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모든 일이 잘 풀려갔다. 고희가 넘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듯했다. 90년 프랑스 뤽상부르 미술관 초대전, 92년 수와의 결혼이 그렇고 91·9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내 작품이 20만 달러에 팔린 것도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해는 러시아 유명 미술관에서 잇따라 초대전을 연 93년이었다.내가 러시아 미술인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90년 뤽상부르 미술관 전시회 개막식 때였다. 관람객에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고 있을 무렵 키가 늘씬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을 소련 유네스코 대표부의 알렉산더 리프킨이라고 소개하면서 내 하모니즘 작품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동서화합 철학과 일치하니 모스크바에서 전시회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소련과 우리나라는 국교가 없으니 우리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우선 말해 두었다. 다음날 그는 유네스코 주재 소련 대사인 블라디미르 로메이코와 함께 다시 찾아 왔다. 나는 그의 제안을 유네스코 주재 황태현 대사에게 알렸고, 한·소 두 대사 사이에 전시회 개최가 약속됐다.
이듬해 초 눈이 채 녹지 않은 쌀쌀한 봄날 소련 문화부에 들어갔다. 미술관 업무를 담당하는 포포프 국장은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난처한 일이 생겼다"며 "푸슈킨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푸슈킨 미술관의 이리나 안토노바 관장이 "동양 사람이니 동양미술관에서 하라"고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어쨌든 관장을 만나야겠다며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대뜸 "당신은 동양 사람이니 동양미술관에서 하지 그러냐"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동양 사람이다. 그러나 내 그림은 동양화가 아니라 국제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푸슈킨 미술관 같은 곳에서 전시해야 한다." 그러자 그녀는 "여기는 유럽 사람들만 전시하는 곳인 데다 생존 작가의 전시회는 열지 않는다"며 "미술관 역사상 생존 작가의 전시는 마크 샤갈 한 사람 뿐이었다"고 말했다. 나도 오기가 났다. "바로 그 점이다. 샤갈과 같은 유명한 화가가 전시를 했기 때문에 나도 이곳에서 전시를 하고 싶은 것이지 아무에게나 전시를 하도록 했다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샤갈도 하지 못한 하모니즘이라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했다. 내 전시회를 일년 늦추면 소련의 청년 화가들이 그만큼 손해를 볼 것이다." 그녀는 다소 기가 죽어 "그렇지만 내가 승인해도 이사진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돌아섰다.
포포프 국장은 미술관을 나오더니 나에게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에서 전람회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화집을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 에르미타쥬 미술관 관장은 93년 6월에 전시를 하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모스크바와 돌아오니 포포프 국장이 "푸슈킨 미술관의 안토노바 관장도 당신 전시회를 하겠다고 한다"고 전해 주었다.
이해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로 바뀌면서 또 한번의 고비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구 소련과 맺은 모든 계약은 새로운 정부와 다시 계약을 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다시 러시아로 떠나는데 문화부 이경문 종무실장이 러시아에 갈 일이 있다고 해서 동행했다.
에르미타쥬 미술관장을 만났더니 러시아 문화성 제1차관이 미술계 인사 20여명과 만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이 모임에서 나는 화집 3권을 관장에게 주었고 그는 한 권은 문화성 제1차관, 한 권은 레닌 훈장을 받은 화가에게 각각 보라고 주었다. 관장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다 갖춘 완벽하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했고 레닌 훈장을 받은 화가도 같은 말을 했다. 다음날 아침 관장이 만나자고 해서 미술관 관장실을 찾아 갔다. 관장은 동행한 이 실장에게 "당신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 실장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나는 대한민국 문화부 장관의 명령을 받은 종무실장인데 이 미술관에서 대한민국 국보전을 치르고 싶으니 전시장을 빌려 달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개인전은 다 틀렸구나"하고 낙담했다. 그런데 관장은 "일전에 뉴욕에서 연 한국문화 5000년 전 말입니까?"하고 묻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내 화집을 가리키며 "우린 이 전시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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