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법조인 칼럼/피해자가 탄원나선 "유괴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법조인 칼럼/피해자가 탄원나선 "유괴범"

입력
2003.08.29 00:00
0 0

얼마 전 카드 빚 때문에 어린이를 유괴한 청년의 변호를 의뢰 받았다. 선정적 보도와는 달리 그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낭비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다만 하던 일들이 경기침체로 어려워지는 바람에 카드 빚을 쓰게 됐다. 다른 카드들로 돌려 막다 결국 그는 범죄의 유혹에 빠졌다. 신혼인 아내까지 보증인이 돼 무자비한 빚 독촉에 시달렸기 때문이다."아저씨가 너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는데 길을 알려주지 않을래?" 그는 학교 가는 아이를 차에 태운 뒤 지금은 폐가가 된 어릴 때 살던 집으로 데려갔다. 천진난만한 아이를 보며 그의 마음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싸웠다. 가는 도중에 그는 염색한 가발과 앵두 코뿔모자 등 삐에로 분장도구를 샀다. 김밥과 과자도 샀다. 그는 아이가 겁먹지 않도록 삐에로가 돼 밤늦게까지 원맨쇼를 했다.

"하나도 재미없어 다른 거 해봐."

아이가 투덜대면 그는 단독공연의 프로그램을 바꿔야 했다. 협박전화를 할 시간도 없었다. 아이가 잠들자 비로소 그는 부모에게 전화를 걸러 나갔다. 위치추적을 피하기 위해 멀리 있는 공중전화로 가야 했다. 그 사이 잠에서 깨어난 아이는 폐가 앞에서 놀다가 주민에게 발견됐다. 신고가 됐고 청년은 몇 시간 후 검거됐다. 돈을 받고도 인질을 살해하는 범인들과는 질이 달랐다. 유괴된 아이는 그 아저씨가 좋았다고 했다.

거리에서 행인들에게 카드 발급을 유혹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갚을 능력도 없는 사람에 카드 발급을 해주는 게 의아했다. 우선 쓰고 보라는 달콤한 유혹의 뒤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갚으라는 무자비한 닦달이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선량한 사람도 순간 범죄인이 될 위험이 충분했다. 이 사건이 단적인 예다. 얼마 전 어떤 남자로부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괴된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 청년을 돕고 싶습니다. 증인으로 나서거나 탄원서라도 쓰겠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은 지옥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청년을 용서했다. 좋은 사람들은 서로의 아픔을 말 없이도 안다.

엄 상 익 변호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