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9> 45년만에 대학졸업장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9> 45년만에 대학졸업장

입력
2003.08.28 00:00
0 0

나는 1989년에야 정식으로 도쿄예술대학(구 도쿄미술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당시 학도병 지원을 한 학생들은 졸업장을 받고 군대에 갔지만 나는 졸업을 앞두고 학도지원병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달아났기에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종전(終戰) 후 졸업장이 필요해서 학교 다닐 때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니시다 세이슈(西田正秋) 선생에게 졸업장을 못 받은 것이 부당하다고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니시다 선생은 이 문제를 교수회의에 올렸는데 졸업장을 줄 수는 없으나 졸업증명서를 발행하기로 결의했다면서 졸업증명서를 보내왔다. 이유인즉 졸업식이 지난 지 오래됐고 정식 졸업장을 주려면 일본 문부성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데 그 절차가 복잡해서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정식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졸업증명서로 졸업장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고희의 나이에 미술학교 졸업장을 받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이뤄졌다. 그 해 9월18일부터 10월17일까지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문화원에서 열린 도쿄예술대학 한국인 졸업생 자화상전이 계기였다. '동경미술학교 43인의 얼굴전'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회는 도쿄미술학교가 창립 100주년을 맞아 연 것이었다. 이 학교는 전통적으로 학생들이 졸업할 때 논문 대신 자화상을 제출하도록 하고 학교에 보관해 두고 있었는데 이처럼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전시를 해왔다. 그러나 나는 초상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시회에 내 자화상이 빠져 있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내가 졸업생이 아닌 것처럼 될 수 있었다.

나는 전시회 때 한국을 방문한 도쿄예술대 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에게 농담 삼아 "내 졸업장을 주지 않은 데 대해 문부성 장관을 상대로 고소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이건 말도 안 된다, 돌아가서 교수회의에 정식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그 뒤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며칠 후 일본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미술학부장이 주도한 교수회의에서 내 문제가 논의됐든데 만장일치로 졸업장을 주기로 결의했고, 문부성 허락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졸업작품으로 내지 못했던 자화상 제작에 들어갔다. 학교에 보관 중인 자화상은 모두 20대의 모습인데 나는 70대의 수염 기른 그림을 그리게 되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 때도 나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 모자를 쓰고 그렸다. 또 실제 얼굴보다 좀 젊게 표현했다. 45년 전에 그렸어야 할 내 모습을 뒤늦게 그리는 동안 나는 세월의 덧없음을 느껴야 했다.

졸업장 수여식은 도쿄예술대학 주최로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졸업식은 주한 일본대사관이 주선했고, 졸업장을 전달하기 위해 후지모토(藤本) 총장이 직접 교기를 들고 방한했다. 또 야나이 신이치(柳井新一) 당시 주한 일본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이 참석했고, 한국측에서는 김종필 총재, 문화공보부 관계자, 미술관 화랑관계자, 화우 100여명이 참석해 성대하게 열렸다.

나중에 뒷얘기를 들어보니 나에게 수여할 졸업장을 만들기 위해 학교측에서는 상당히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우선 발급자도 당시 우에노(上野) 총장의 명의로 했으며 형태도 예전과 동일하게 했다. 졸업연도는 19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졸업장 고유번호도 당시 졸업한 동급생들의 일련 번호에 맞춰 고유 번호를 부여했다.

졸업장 수여식은 교기만 걸어두고 치렀다. 이 자리에서 후지모토 총장은 "뒤늦은 졸업증서라서 유감이다. 그러나 한국화단의 원로인 동창생에게 경의를 표하며 이 증서가 한일 양국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는 데 이바지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 화백이 학병 거부 외에는 졸업에 결격 사유가 없고 한국 내 화단에서의 위치로 보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졸업장 발급에 문제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제 때에도 군인이나 정치인 등 제국주의자들이 문제였지, 문화예술인들은 순수하고 존경할 만한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이렇게 졸업장을 받은 이후 나는 일본에 오가며 몇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그 때마다 도쿄미술학교 동창생들은 나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