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空(공), 破滅(파멸)입니다." 한국 근대조각의 완성자, 현대조각의 문을 연 권진규(權鎭圭·1922∼1973)는 이 말을 유서에 써놓고 목을 맸다. 51세였다. 단지 공이고 파멸이었을까. 권진규의 작품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유로 든 그 언어들의 덧없음을 넘어서는 어떤 기운이 감돌고 있다. 그의 손에서 부드러운 진흙은 귀기(鬼氣) 서린 자소상으로, 신비 어린 여인상으로, 전설 같은 동물상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올해는 권진규의 30주기다. 개관 20주년을 맞은 가나화랑이 '권진규 30주기전'을 인사아트센터에서 28일 개막, 9월15일까지 연다. 그의 테라코타와 옻칠 기법을 원용한 건칠(乾漆), 목조 등 대표작 70여 점이 나온다. 또한 사후 30년 동안 서울 성북구 동선동 작업실에 그대로 보관돼 있던 부조와 테라코타 여인상, 미완의 목조 불상조각, 석조 등 20여 점이 최초로 빛을 본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50년대의 스케치북 2권에 실린 드로잉 30여 점도 처음 공개된다. 모두 120여 점의 작품과 함께 유서, 손때 묻은 기물과 유품도 함께 전시돼 고인의 인간적 면모를 엿보게 한다. 좀처럼 접하기 힘든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춘엽이라는 이름의 비구니를 새긴 '춘엽니'. 권진규 인물상의 특징인 길다란 목, 일반적 인체 구조와는 달리 유난히 좁게 처리한 어깨선 위로 한 비구니의 얼굴이 고요하게 떠오른다. 건칠 기법으로 만든 거무스럼한 잿빛의 흉상은 주위의 모든 소음, 빛의 부스러기 같은 것들을 잠재워버린다.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아우라가 오직 보는 이와 작품을 맞대면하게 만든다. 일반에 비교적 잘 알려진 '지원의 얼굴'이나, 머리 깎은 승려처럼 스스로의 모습을 기와흙 빛깔로 빚은 '자소상' 도 마찬가지다. 권진규는 모델을 써서 테라코타를 만들 때 같은 틀에서 작품을 두세 점 떠내 한 점은 모델에게 주고 틀을 깨 없앴다. 이번 전시는 이렇게 만든 '여인 흉상' 한 점이 개인 소장자에 의해 출품돼 똑 같은 작품 두 점이 35년 만에 재회하는 기회도 됐다.
이 모든 작품들에서 감지되는 권진규 조각의 어떤 생령(生靈) 같은 기운, 음울하면서도 강렬한 현실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미술평론가 최열은 그것이 "자신의 고뇌와 시대의 우울함을 일치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식민지와 해방, 분단과 전쟁, 전통과 서구문화의 갈등 등 20세기 한국 예술가의 고뇌가 그에게서는 본능적이고도 근원적으로 감지된다는 것이다. 함남 함흥 출신인 권진규는 춘천고보를 졸업하고 1942년 도쿄로 가 사설 미술강습소에 다녔다. 이듬해 일제에 의해 징용됐다가 탈출, 고향으로 돌아와 숨어 지낸다. 이 때의 기억이 그를 음울한 영혼의 내면으로 침잠케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후 1949년 다시 일본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에게 본격적으로 조소를 배우고 10년 후 귀국했다.
최씨는 "권진규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추상조형으로 급격히 이동해 갈 때도 리얼리즘에 바탕한 구상조형을 지키고 한국 현대 조소예술의 문을 열었다"며 "작품에 감도는 비극과 구원, 음울한 진실의 분위기는 그의 완강할 정도로 엄격한 고전성에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전시 문의 (02)736―1020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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