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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8> 불타버린 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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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8> 불타버린 내 그림

입력
2003.08.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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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1988년 초에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간 것 같아 지금도 악몽에 시달린다.저녁 9시 뉴스를 보고 화실에서 이젤 앞에 서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급하게 울렸다. 내가 전화를 받아 보니 얼마 전 내 그림의 표구를 맡긴 청기와 화방의 사장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모니즘 대표작인 동시에 초기 작품 16점이 불타버렸다고 말했다. 당시 표구를 맡은 화방 사장은 공장이 모두 잿더미가 된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내 그림이 불탄 데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죽어가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이 깜깜하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몇 해를 두고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들이 한 순간에 사라지다니.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쳐 보아도 타버린 그림이 되돌아올 리 없어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주위에서는 배상금을 받아야 된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아무리 배상금을 천만금을 받아본들 타버린 그림이 돌아오겠는가. 나는 허공을 쳐다보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일이 잘 안 되려고 했던 것 같다. 이것은 어찌 보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기 몇 달 전 프랑스의 세계적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올림픽공원에 조각 공원을 만들기 위해 방한했을 때 나를 수소문했다.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 전람회를 프랑스 파리에서 했을 때 그는 내 그림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해 주었고 언제 한국에 오면 한번 만나자고 약속한 바 있었다. 당시는 내 하모니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어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전을 주선한 국립현대미술관 관장도 내가 프랑스 시절에 그린 작품을 전시할 줄 알았는데 하모니즘 작품을 전시하였다고 탐탁치 않게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그는 나의 작품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에 와서 화랑을 찾아 다니며 김수를 찾았으니 국내에서 김수라는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그가 '청기와 화방'에 들러 나를 찾으니 화방 사장이 대뜸 나에게 연락을 해서 "지금 프랑스 사람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레스타니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하면서 파리의 미술관 전시를 의논하였다. 그런데 그가 나의 그림을 보더니 미국의 데이비드 살레의 그림과 닮았다고 하여 나는 즉시 1977년 I.M.F 미술관 전시 때의 선언문을 보여 주었더니 그가 무릎을 탁 치면서 "김수, 이 작품은 역사적 작품입니다. 이 작품들을 절대 팔지 마시오. 내가 프랑스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하도록 주선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그 후 나는 아직 전시할 미술관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전시할 수 있도록 미리 표구를 새롭게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화방 주인 조 사장은 화재사고가 난 한 2∼3일 후에 나를 찾아왔다. 그는 손에 집문서를 들고 눈물을 흘리며 "저의 전 재산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라도 받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가로 막으며 "조 사장, 도로 가져가시오. 이 엄동설한에 이것을 나에게 주면 조 사장은 집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어디에서 살 것이오. 보험금을 받더라도 공장부터 먼저 차리고 자립하는 길을 마련하시오. 이제 모든 것을 잊어버립시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이때까지 막혀있던 내 가슴이 확 뚫리면서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살리는 동시에 내 자신도 살린 것이다. 나는 그를 보내고 다시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악몽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나는 조 사장과 형제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조 사장은 나의 파리 전시회에 따라와 진열을 도와주었다. 또한 1993년 러시아 푸쉬킨, 에르미타쥬 미술관 전시회 때도 동행해서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전시회도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인사동 그 자리에서 사업을 하며 많은 고객을 갖고 있고, 언제든 변하지 않는 우정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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