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계속 '바람난 가족' 이야기지만 이번엔 관점을 좀 달리 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장면에 이르렀을 때 은근한 근심 걱정이 들었다. 문소리의 '달밤 누드 체조' 장면과 황정민의 샤워 신. 화면이 어둡게 처리되긴 했지만 언뜻언뜻 털이 보이는 것도 같아 "저거, 저러다가 나중에 문제 되면 어쩌지?"하는 기우에 빠졌다. 사실 그게 내 털도 아니고, 털이 보이든 말든 영화사 소관인데 그런 걱정을 했다는 건, 아마도 영화 심의당국이 내 머리 속에까지 '털은 안돼!'라는 생각을 단단히 심어놓은 모양이다.1970년대 호스티스 영화에서는 심심찮게 털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겨드랑이 털이다. 그때만 해도 문명화(?)가 덜 됐는지 겨드랑이 제모가 필수사항은 아니었고 깎아도 항상 듬성듬성 자국을 남기곤 했다. 그러나 성기 노출은커녕 그 부근의 터럭 한 끝조차 허용하지 않는 게 변함 없는 전통이다. 80년대 국책 차원에서 에로 영화를 지원했을 때도 음모 노출만은 절대불가였다. 물론 예외는 있다. '크라잉 게임'의 그 전설적 성기 노출 신! 극의 흐름상 도저히 뺄 수 없다고 판단한 당시 심의 담당자는 노출 시간을 축소하는 식으로 그 장면을 살렸다는 미담을 남겼는데 그 분이 바로 현재 부산국제영화제의 김동호 위원장이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대목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린 모자이크 처리가 되지 않은 성기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음모를 스크린에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씩 실수로 드러나는 털 앞에서 동공 확대 현상을 겪기도 했으니 여기 어느 에로 마니아가 모아놓은 '한국영화 속 털 목록'이 있다. 올림픽을 전후해 잠시 검열이 느슨해진 시기에 나온 '빨간 앵두 4'. 목욕탕 겁탈 신과 부부 베드 신에서 검은 그 무엇을 찾을 수 있고, 개봉 당시 이 장면이 입소문을 타서 흥행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고 한다. 강리나 주연의 '클라이막스 원'의 샤워 신, '빨간 앵두 2'에서 여주인공이 슬립 입고 비바람 맞는 신, '애마부인 2'에서 바닷물에 흠뻑 젖은 오수비의 뒷모습, '매춘'에서 슬립을 입은 나영희가 전화 받고 일어서는 장면, '야누스 불꽃 여자'의 강간 신, '삼색 스캔들'의 나체 수영 신, '산딸기 3'의 폭포 아래 목욕 신…. 모두 털이 나오는 장면들이다.
그 숨겨진 몇 초를 위해 쏟은 누군가의 노고가 측은하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볼 권리를 박탈당한 현실에 대한 비애 때문일 거다. 영상물 등급 심의위원에 대해 '조그셔틀의 달인' 운운했던 기사를 읽었다. 심의라는 게 영화 내용을 보는 게 아니라 '털'을 찾는 과정이라는 거다. 화면을 빨리 돌리며 보는데도 털만큼은 귀신 같이 잡아낸다니 달인의 자부심, 인간문화재 수준의 내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찾아낸 털은 등급 보류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국 모자이크 처리를 거쳐 시중에 유통된다. 그들은 면도사일까? 그렇다면 영상물등급위원회는 거대한 이발관이란 말인가!
/김형석·월간스크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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