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파리 뤽상부르 전시는 내 인생에서 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결정적으로 일깨워 주었다. 국내에서는 별 관심을 끌지 못한 나의 하모니즘 작품이 미국 신예작가 데이비드 살레보다 앞섰다는 증거를 처음으로 수가 찾아주었고, 이를 본 프랑스 저명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한 것은 물론 프랑스 전시를 적극 주선하고 나섰다.전시 진행과 준비를 위해 파리에 있던 수는 예리한 판단으로 위기에 처한 전시회를 살려내기도 했다. 뤽상부르 미술관 전시를 6월에 하기로 프랑스 상원과 약속했는데 한국 작가가 파리에서 대규모 초대전을 열다 보니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보증이 필요했다. 당시 한우석 대사가 나의 전시를 보증하는 서류에 서명했고, 국내 언론에도 파리 전시 관련 기사가 나갔다. 그런 상태에서 프랑스 상원의장 비서실장이 전시 일정을 뒤로 미루어 놓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수는 내가 빨리 파리에 와야 해결될 것이라고 재촉했다. 파리로 달려가 당시 전시회를 주선한 전 문화성 국장 안토니오 베르나르에게 "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나의 하모니즘 작품을 보이러 온 것이지 바캉스 시즌인 7월에 파리에 온 외국인에게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고 항의했다. 또 "우리 대사관이 서명을 했으면 먼저 대사관에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이를 무시하고 전시일자를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전시회를 취소하겠다"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베르나르씨는 당황해서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을 찾아가 "이 전시를 원상복구하지 않으면 외교문제가 생길 것이다. 작가가 지금 파리에 와 있는데 단호하게 원상복구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자 외교분과 위원장이 상원의장에게 항의 편지를 써 보내 전시일정을 원래대로 하게 됐다.
수는 파리에서 내 대신 전시회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열렸다. 사실 전시회를 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성과를 올리느냐가 중요하다. 우선 레스타니씨가 파리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전문지인 로레이유에 김수(김흥수)의 하모니즘은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고, 프랑스 국영TV 앙텐2도 저녁 9시와 아침 7시 황금시간대 뉴스에서 김수의 작품은 현대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는 그의 논평을 곁들여 전시회 소식을 알렸다. 그러고 나서 전시회가 시작되자 매일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와 미술관에서는 기록적 관객이라고 기뻐했다. 관람객 가운데는 이런 아름다운 그림은 처음 본다며 일곱 번씩이나 보러 온 사람도 있었고, 다리가 부러져 입원 중이던 발레리나는 목발을 짚고 와서는 "친구가 꼭 가보라고 해서 왔는데 정말 기쁘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전시회는 수의 적극적 내조 덕분에 성공리에 마쳤다. 이후 뤽상부르 전시회 개막식을 비롯한 각종 공식행사에 수가 동행하다 보니 그의 존재는 세상에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여성지에서는 우리를 취재하기 위해 끈질기게 수를 설득했고 마침내 우리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시가 끝난 후 수는 파리에 공부하러 간다고 7개월이나 나가 있었는데 나는 혼자 있다 보니 수가 옆에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그래서 당장 수를 불러들여 1992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결혼식이라는 이름은 붙이지 않고 그저 친지를 초청하는 자리라고 하면서 당시 김종필 민자당 최고위원에게 주례를 부탁했더니 그는 선뜻 응해 주었다. 사회는 내가 좋아하는 아나운서 김동건씨에게 부탁했는데 그도 쾌히 승락했다. 두 사람은 우리 결혼식의 권위를 세워주었고 결과적으로 적지않은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 사이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던 나쁜 소문들이 소낙비 그치듯 일시에 멎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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