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오후 6시 퇴근 무렵 서울 중구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15층 홍보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녀 은행원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최고참 박성수(35·본점 대기업영업본부) 과장과 막내 이지윤(24·여·창동지점 입출금담당)씨 등 모두 7명이 모였다. 이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만 마실 뿐 도무지 말들이 없다. 정적을 깨고 박 과장이 요즘 유행하는 개그 코너인 '우격다짐'식으로 기자에게 물었다. "우리가 누구게?"박 과장은 정답 대신 일단 4층 대강당에서 10분 후에 보자고 말했다. 10분 후. 평범해 보였던 이들 7명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돼 있었다. 박 과장은 어느새 반바지에 하얀 색 전기기타를 메고 있었고, 이지윤씨는 머리에 두건을 쓴 채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무대에는 이미 드럼 세트와 대형 앰프, 스피커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자, 우리가 어떻게 노는지 보여드릴까요? '변신괴물'의 저력을요."
신승수(32·본점 영업부) 대리의 격렬한 퍼스트기타 음을 시작으로, 오영조(32·본점 정보시스템부) 대리가 능숙한 솜씨로 드럼을 때렸고 이어 미식축구선수 같은 덩치의 김경훈(29·본점 어음교환실) 대리가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곡은 팝 계열의 외국곡 '비너스'. 베이스기타(강평원·33·계동지점 기업금융부문 과장)와 여성보컬겸 코러스(이지윤, 송인숙·25·소공동지점 수출입담당 계장)도 흥을 돋웠다. 수준급의 실력을 뽐냈다.
낮에는 평범한 은행원이었다가 밤이면 록커로 변신하는 이들이 바로 국내 유일의 은행원 록그룹 '변신괴물'이다. 1998년 결성돼 지금까지 10여 차례 자선모금을 위한 정기공연을 가졌고, 2001년 7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중국 문화부와 한국관광공사 공동 주최로 열린 한중문화제에도 정식 초청됐다. 9월 하순에는 외환은행 대강당에서 가을맞이 정기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제가 지난해 8월 입행했는데 신입행원 교육기간 '오빠'들의 멋진 공연모습을 보고 그대로 반했습니다. 처음에는 외부에서 초청한 록그룹인 줄 알았죠. 은행 선배들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곧바로 오디션을 거쳐 가입했어요. 저도 이제 당당한 '변신괴물'이 된 거죠."(송인숙)
'변신괴물'이 결성된 것은 98년 5월 서울 화양동지점에 신승수 대리와 김경훈 대리가 한꺼번에 발령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국민대 재학시절 록 서클을 결성했을 정도로 록에 심취해 있던 신 대리와, 동대문상고 재학시절 3 옥타브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놀라운 음역으로 교회 성가대에서 맹활약했던 김 대리가 자연스럽게 의기투합한 것.
"곧바로 사내 전자게시판에 록그룹 창단 공고를 냈습니다. 1주일 만에 댄스음악이나 발라드에 식상해 있던 7명의 록 마니아가 모였죠. 당시 홍세표 외환은행장도 직접 전화를 걸어 '나도 열렬한 팬'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대성황이었습니다."(신승수)
"은행일을 하면서 음악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모여서 연주하고 노래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외환위기로 전 은행원들이 의기소침해 있었던 시절이어서 반응이 더 뜨거웠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외환은행에서 '변신괴물'을 모르면 '간첩'입니다."(김경훈)
이렇게 탄생한 '변신괴물'은 장비 마련부터 연주곡 선정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했다. 전설적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이 애용한 펜더사의 동종 모델 전기기타(250만원), 300만원을 호가하는 스웨덴산 베이스 앰프 등 이들이 보유한 장비 값은 총 3,000만원을 넘는다. 집에 전기기타만 15대, 록음악 CD는 3,000장을 헤아린다는 신 대리는 "실력이 안 되면 장비라도 좋아야 한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연습은 통상 1주일에 한번 대강당에 모여서 새벽 1∼2시까지 하고, 이번처럼 정기공연을 앞둘 때는 공연 1주일 전 합숙에 들어간다. 연습곡은 '록의 부활'을 표방한 만큼 철저하게 록음악으로 짜여진다. '록 앤 롤' '모비 딕'(이상 레드 제플린), '스모크 온 더 워터' '스트레인지 카인드 오브 우먼'(딥 퍼플), '스위트 차일드 오브 마인'(건즈 앤 로지즈) 등 대부분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록의 명곡들이다.
"공연용 연주곡은 어떻게 선정하느냐고요? 물론 팀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후 팀의 리더인 제가 일방적으로 정합니다."(신승수) "5년 동안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니까 실력도 더 느는 것 같습니다. 전문 음악프로덕션에서 스카우트해가지 않을까, 걱정이에요."(김경훈) "스내어 드럼, 심볼즈, 플로어 탐탐 등 각 드럼 파트를 치다 보면 1주일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습니다."(오영조)
끝으로 왜 록그룹 이름을 '변신괴물'로 지었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시간을 쪼개서까지 음악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 대리가 했다. "팀 결성 후 우연히 라디오에서 재미있는 수수께끼를 들었어요.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때는 세 발로 걷는 동물은?' 정답은 바로 '변신괴물'입니다." 두번째 대답은? 모두가 씩 웃으며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를 들려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음악을 하는 동안 이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글 김관명기자kimkwmy@hk.co.kr
사진 손용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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