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민주주의를 지배하지 않는다. 돈이 민주주의다."소비자본주의의 종주국이라 할 미국에서 나오는 소리다. 가수 신디 로퍼가 불러 히트시켰던 노래 제목 그대로 미국인들은 점점 더 "돈이 모든 것을 바꾼다(Money Changes Everything)"는 신앙에 빠져들고 있다.
소비자본주의 체제의 신분증은 신용카드다. 미국의 10대 소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소일거리로 쇼핑을 꼽은 비율이 전체의 93%에 이르렀다. 미국은 가구당 평균 7,500달러가 넘는 빚을 지고 있다. 그게 다 신용카드 덕분이다.
다니엘 벨은 1976년에 낸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신용카드의 분할 지불 방식은 "돈을 빌리는 일에 공포감을 품고 있던 프로테스탄트적 윤리에 최대의 공격을 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엔 기만적인 언어 조작이 가세했다. '돈을 빌린다'고 말하는 대신에 '크레디트'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용카드는 '채무카드'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그렇게 부른다면 신용카드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앉는 사람들의 수도 크게 줄 것이다.
미국 일이야 미국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당장 급한 건 우리 사정이다. 우리는 신용카드 남발을 선진국으로 가는 길로 여겨 열심히 미국의 뒤를 추격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신용 불량자가 300만명을 넘어선지 오래고 가계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70%에 육박했다.
신용카드 빚더미에 올라앉아 자살이나 범죄를 택하는 사람들이 속출해 이젠 웬만큼 충격적이지 않고선 뉴스조차 되지 않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런 비극 속에서도 행복해진 사람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내수로 경기부양을 이루겠다며 신용카드를 마구 써대라고 국민의 등을 떠밀었던 정부는 무슨 효능을 보았는가? 카드 회사는 떼돈 벌었는가? 한국의 9개 신용카드사들이 2003년 상반기에 3조원이 넘는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신용카드의 과잉 발급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신용카드사들을 덮친 형국이다.
뒤늦게 "신용이 사라지면 당신도 사라집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공익광고가 나오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우리는 소비가 정체성 구현의 수단으로 등극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치'니 '허영'이니 하는 고전적인 단어로 매도해봐야 소용없다. '명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마저도 자신들이 '사치'나 '허영'에 들떠있다고 하면 펄펄 뛸 것이다. '명품'에서 스스로의 품위는 물론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 더 나아가 남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데 말이다.
우리 사회에 정체성 구현의 수단이 소비 이외에 너무도 없다는 점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공동체 문화가 파괴된 탓이 크다. '공동체'라고 하면 일부 좌파는 파시즘을 연상하고 일부 우파는 반(反) 시장논리를 연상하니, 무난하게 '공공 영역'이라고 해두자.
웬만한 지방 중소도시에 가보라. '공공 영역'을 서울이 점령해버렸다. 연고망 이외엔 시민들이 어울릴 마당도 기회도 없다. 지방자치는 지방자치 전문가들의 몫일 뿐이다. 참여? 소가 웃을 일이다. '개혁'도 '개가죽'으로 보는 냉소의 강이 흐르고 있다. '공공 영역'부터 살려야 한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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