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22일 언론은 뜬금없이 공판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서울형사지법 합의8부는 21일 상오10시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고대노연) 사무국장 김낙중(金洛中·38)이 중심이 된 NH회의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첫 공판을 열고, 관련 피고인 11명에 대한 사실심리를 시작했다. 피고인들은 지난 5월 24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선동·음모 등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구속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낙중은 55년 6월 월북, 약 1년간 간첩교육을 받고 남하, 고대 서클인 한맥회 회원을 포섭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북괴의 지령에 따라 'NH회'라는 지하서클을 조직, 정부를 비방하는 유인물 '민우지'를 제작하여 뿌렸다"는 것이다.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과업 착수' 특별선언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국회가 해산되고, 대학 휴교, 언론 검열 등이 시행됐다. 12월 23일 박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새 대통령으로 뽑혔다. '10월 유신'은 위수령(71년)으로 서리를 맞은 대학가를 꽁꽁 얼어 붙게 만들었다. NH회 사건은 유신 이후 첫 대학 공안사건이었다. 그것은 고대 이념서클 '한맥회'의 뿌리를 뽑기 위해 기획됐다. 한맥회는 위수령과 함께 해체됐으나 구성원들은 유신체제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민우'라는 유인물을 새로 만들었다. 10월 유신을 비판하면서 군사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는 것으로 처음엔 공단 주변에 뿌려졌다.
특별선언 직후 72년 12월 초 고대 정문에 '한국적 민주주의 이 땅에 뿌리 박자'는 현수막이 걸렸는데, 누군가 이를 불태워 버린 일이 있었다. 이듬해 3월 개학과 동시에 유인물 '민우'가 학내에 살포됐다. 현수막 소각과 유인물 배포 사건의 주범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중정은 전 한맥회 회장과 재학생 회원들을 검거했다. 유신을 논의·반대하는 자를 처벌하는 긴급조치가 생기기 전이었던만큼 이들을 엄벌하려면 '학생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이들과 북괴와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18년 전에 월북한 전과가 있는 김낙중씨가 고대노연 사무국장을 하고 있음에 착안한 중정은 거기서 고리를 발견했다. 한맥회 회원들이 방학에 강원 도계탄광으로 현장실습을 가면서 김낙중 노연 사무국장의 조언을 받았던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노연 관계자 2명, 탄광 관계자 1명, 학생 8명(제적생 포함)으로 이뤄진 학원 침투 간첩단이 형성됐다. 3월부터 학생들이 검거됐고, 5월에 김낙중씨가 끌려갔다.
수사 도중 'NH회'라는 지하조직의 이름도 만들어졌다. 한맥회는 회보 '한맥'을 발간하면서 제호 아래 '우리는 휴머니즘과 민족주의를 추구한다'는 모토를 항상 기재했다. 이 모토는 유인물 '민우'에도 이어졌다. 중정은 한맥회의 부활을 추구하는 학생들에게 휴머니즘(Humanism)과 민족주의(Nationalism)의 이니셜을 따서 'NH회'라는 멋들어진 조직을 만들어 주었다.
위수령으로 제적돼 도피생활을 하다 NH회 사건으로 징역5년을 선고받고 78년 5월 출소한 함상근(咸相根·53·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사무총장)씨의 증언. "위수령 이후 제적자 명단에 포함됐고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구로공단 주변에 방을 얻었다. 전태일 분신(70.11.13) 이후 휴학하고 공단에 (위장)취업한 친구와 후배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과 만나 근로자 야학을 시작했다. 한맥회 전 간부들이 모여 노동자를 위한 유인물을 만들었다. 민중의 벗, '민우(民友)'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맥회의 모토는 당연히 '민우'의 그것이었다. 노동문제 관련 자료를 접하기 위해 종종 노연에 들렀으며, 자연스럽게 김낙중 사무국장을 만나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73년 3월 30일 낮 국립도서관(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너 함상근이지.'
중정 남산 분실로 끌려갔다. 그들은 다짜고짜 양말을 벗기더니 발가락을 뒤집었다. 동상 자국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잠적한 동안 월북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 겨울에 산을 타고 남하했으니 틀림없이 발가락에 동상 흔적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던 것이다. 월북 하지 않았음을 안 그들은 '남파간첩과 접선한 사실을 불어라' '북괴의 국내 세포조직을 대라'며 별별 고문을 다했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2주일 정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4월 중순께 그들은 나를 경찰병원으로 끌고 가 억지로 링거 주사를 꽂았다. 4월 19일 다시 남산 대공분실로 왔다. 후배들도 잡혀와 있었다. '왜 한맥회를 부활시키려 하느냐, 왜 유인물을 만들었느냐'는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 때 'NH회'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18년 전에 월북한 경험이 있는 김낙중씨와 NH회라는 새로운 지하조직을 엮어 '학원 침투 간첩단'이 조성된 것이다."
정병진 편집위원bjjung@hk.co.kr
● 김낙중 당시 고려대 勞硏 사무국장
67년 11월부터 고대노연에서 일했다. 명지대에 강사로 나갔으며, 69년 2월부터 노연 사무국장을 맡았다. 70년부터 고대 정경대와 법대에서 강의를 맡았다. 전태일 분신 이후 노동운동이 활발해졌다. 출장 강의가 잦았다. 73년 5월 초 제주시에서 열린 한국노총 노조교육에 강사로 초빙됐다. 도착한 다음날 강의실 입구에서 연행돼 서울로 압송됐다.
한두 달 전에 끌려온 학생들은 이미 초주검이 돼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3번 있었다. 첫 만남은 위수령으로 한맥회가 해체된 뒤였다. 한맥회 김윤환 지도교수가 고대노연 소장이었다. 그들은 72년 봄 연구소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한맥회가 해체됐다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 새로운 서클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앞으로는 정치적 이슈보다 노동운동이나 농촌운동에 관심을 가져라. 언제든 도와주겠다"고 했다. 두번째는 이들이 72년 여름방학 때 강원도 도계탄광으로 노동체험을 간다며 자문을 구하려 왔다. 나는 탄광 관련 자료를 보여주었다. 세번째는 그들이 탄광을 다녀와서 함께 좌담회를 가진 일이었다. 좌담회에는 노연 간사인 노중선씨, 도계탄광 관리인 손정박씨도 참석했다. 이들과 함께 간첩단이 됐다. "노동문제를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 노조가 발전해야 복지사회가 된다"는 말을 했다. 이러한 일이 '지하서클을 만들고, 학생운동을 노동·농민 연합전선으로 발전시켜 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내란음모로 둔갑했다. 더 이상 고문을 받느니 차라리 사형을 당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간첩죄가 추가됐다. 중정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70년 노연 사무국장 당시 서독의 프리드리히에버트 재단에서 강연 초청장을 보내왔다. 반공법 전과가 있었던 나로서는 여권을 신청하면서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장문의 청원서를 냈다. 여권은 나오지 않았고 서독행은 무산됐다. 이것이 3년 후에 '동베를린을 거쳐 평양으로 밀입북하려 했다'고 기소됐다.
나의 '간첩 활동'은 22세 때부터였다. 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54년 2월 부산 광복동에서 북진통일을 반대하는 1인 삭발 시위를 하다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 해 9월 평화통일 호소문을 만들어 김일성에게 전달하러 판문점에 갔다가 경찰에 연행됐다.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과대망상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나흘만에 퇴원하고 대학에 자퇴원서를 냈다. 몇 달동안 혼자 '통일독립청년 공동체 수립안'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수립안을 발송했다. 경무대에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보름 뒤 '미친 놈'이라는 낙인과 함께 풀려났다. 북한에도 수립안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55년 6월 25일 부모님과 치안국장 앞으로 편지를 쓴 뒤 임진강 지류에서 튜브를 타고 월북했다. 곧바로 포승에 묶여 평양으로 압송됐다. 그들은 나를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여겼다.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강요한 뒤 간첩죄로 기소했다. 8월 중순 갑자기 나를 평북 용암포 군인병원에 입원시켰다.
5개월 정도 고문후유증을 치료해 주고 평양의 한 민가로 보냈다.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하며 몇 달을 보냈다. 이듬해 봄 남쪽으로 가도 좋다고 했다. 나의 수립안에 대해 지도원 간부는 '남한 당국이 공식 요구하면 토의할 용의가 있다'는 답장을 써 주었다.
56년 6월 20일 아침,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걸어서 넘어왔다. 미군 수사대를 거쳐 한국군 정보대로 이첩됐다. 아무도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서울시 경찰국으로 넘겨져 북괴의 간첩임을 자백하라며 고문을 받았다. 57년 6월 간첩죄에 대해서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1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출소 후 고대 경제학과에 편입학, 대학원에 진학했다. 농민문제와 노동문제에 천착했다.
NH회 사건 수괴로 징역7년을 선고받고 80년 5월 출소했다. 87년 6월항쟁 전까지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였다. 90년 11월 민중당 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과정에서 북한 연락대표와 접촉하고 금품을 수수한 것은 사실이다. 같은 민족의 정당활동을 돕는 것은 평화통일의 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92년 대선을 앞두고 '55년부터 36년간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98년 8·15특사로 출소, 현재 형집행정지 상태다. 평생 간첩이란 멍에를 짊어졌으나 죄를 짓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만은 스스로 죄를 짓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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