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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3> 내 사랑 수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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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33> 내 사랑 수 ①

입력
2003.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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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 수(장수현)는 내 인생과 예술을 확실히 정립시켜 준 주인공이다. 그를 만나면서 나는 인생을 새롭게 보았고, 내 예술도 빛을 발했다. 모든 만남은 운명적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수는 운명 이상이다. 돌이켜 보면 수를 알고 결혼까지 한 게 꿈만 같다. 교수와 제자의 결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42세의 나이 차이, 그것도 정년을 앞둔 노교수와 신입생과의 만남과 결혼은 온 세상을 뒤흔든 엄청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방황하는 나를 붙잡아 주면서 온갖 소문과 억측을 물리치고 오늘의 내가 있게 한 수와의 만남과 결혼할 때까지의 과정을 돌아보아야겠다. 우선 수와 만난 후 내게는 대화라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고 과거의 결혼생활에서 맛보지 못했던 예술가적 생활에 잠길 수 있었다. 이것이 나에게 절대적인 토양이 된 것이다.나는 덕성여대 교수로 부임하던 즈음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전처에게 그림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준 데다 아이들과도 떨어져 지내다 보니 나는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자신감을 상실했던 것이다. 또 당시 후배들 작품이 호당 60만원 정도 할 때 내 작품은 그 절반 밖에 나가지 않아 자존심도 꽤나 상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림만 그렸다. 강의를 시작하면서부터 어린 여학생들과 매일 만나 대화하고 어울리다 보니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리고 1983년 신학기가 시작됐다. 당시 서양화과 학생들은 30여명이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라 앳된 얼굴들이 모두 환하고 예뻤는데 그 중에서도 동양적인 얼굴형에 눈빛이 맑은 인상적인 여학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수였다. 수업 시간마다 항상 뒤에 앉아 있는 그에게 일부러 다가가 가끔씩 말을 던져보면 감성적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수는 대학에 들어오기 위해 삼수를 해서 다른 학생들보다 두 살 정도 나이가 많았다.

데생 강의 때 나는 학생 하나하나 돌아가며 지도를 했는데 수는 자리가 맨 뒤라 항상 마지막 차례였다. 그러다가 하루는 몇 가지 기법 등을 지도하려고 하자 고집을 피우고 반발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대뜸 "말 많으면 시집 못 가"라고 쏘아붙이자 금세 귀밑까지 발개졌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면 우선 맨 뒤쪽을 바라보면서 수를 찾게 되었다. 수가 보이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했다. 그리고 그가 앉아 있는 게 보이면 안심이 되었고, 강의를 하는 도중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쪽으로 눈길이 갔다.

1학기 종강하던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낙원아파트의 내 집으로 학생 모두를 초청했다. 전에도 가끔 학생들 몇몇을 초대하곤 했다. 오랫동안 해외에서 자취생활을 하다 보니 제법 요리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그림 지도도 했다.

그런데 이날은 종강이라 학생들이 모두 왔는데 나는 학생 하나하나에게 서양식으로 포옹을 했다. 학생들도 내가 정년을 앞둔 노교수라서 그런지 별 거부감을 갖지 않고 응해 주었다. 학생들은 의례적으로 포옹을 해왔으나 수에게서 받은 느낌은 좀 달랐다. 이때 다른 학생들이 거실에 있는 동안 수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가 다시 한번 껴안았다. 그런데 조용히 안겨오는 수에게서 나는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자주 수를 우리 집으로 불렀다. 수는 친한 친구들 몇몇이서 함께 놀러 와서 맛있는 음식도 해먹고 둘이서 놀러도 다녔다. 당시 자취를 하고 있던 수는 내가 만들어준 음식이 무척 맛있다며 좋아했다.

그때까지 나는 미국의 전처로부터 온 첫 번째 이혼장에 서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날 두 번째로 이혼장이 날아들었다. 그걸 수에게도 보여 주었다. 모든 걸 설명해주면서 내 결혼생활이 얼마나 불행했는가를 얘기해 주었더니 수는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면서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스승과 제자 이상의 관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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