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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자주 국방과 "어른다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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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자주 국방과 "어른다운 나라"

입력
2003.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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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자주 국방을 역설한 것이 논란을 부르는 상황에 1970년 대 말의 낡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도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 국방 구호가 드높았다. 인권 외교 기치 아래 주한 미군 철수 카드까지 빼든 카터 미 행정부의 압박에 맞서 유신 독재를 수호하려는 계산에서 비롯됐다지만, 특히 갓 임관한 필자와 같은 군인들에게는 민족적 정서를 자극하는 구호였다. 장교 정보교육에서 미국과의 군사적 갈등 비화를 소개하던 교관이 "미국 놈들이…"라고 열 올리던 기억이 생생하다.강대국에 휘둘리고 매달렸던 나라의 자주 국방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 시절 군에 있던 이들은 철모와 M16소총 장갑차 초계함 등에 이르는 국산 장비와 무기를 대하면서 가슴 벅차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사일 등 첨단 무기 개발을 견제한 미국과의 갈등을 떠나서도 자주 국방은 힘겨웠다.

해군 함정 포술장교로 근무할 때,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한 국산 어뢰가 첫 발사 시험에서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탐색을 맡은 함정 여러 척이 며칠 동안 바다 밑을 훑고도 찾지 못하는 체험을 했다. 국산 함포와 포탄은 사격중 포탄이 포신에 녹아붙는 소착탄 발생율이 높았고, 미제 포신과 포탄을 아껴두었다가 전투검열 때만 꺼내 쓰는 요령도 배웠다. 사병들 사이에는 새로 지급된 국산 철모는 총알에 잘 뚫린다는 낭설도 나돌았다.

그만큼 그 즈음의 '자주 국방' 노력은 무모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권국가의 진정한 자주 독립이 절실하며, 힘겨운 만큼 커다란 자긍심을 동반한다는 각성과 비전을 남겼다. 박 대통령은 이기적 목적을 떠나 방위 산업의 초석을 놓았고, 미국의 한국군 현대화 지원과 팀스피리트 연합훈련 등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위장된 타협이었다. 2차대전후 최대 규모의 전쟁 연습 팀스피리트 훈련은 미국의 세계 전략에 이바지하는 것이었고, 공포에 질린 북한의 핵개발을 촉발해 한반도 안보의 불안 요인이 됐다. 이 훈련 시작 이듬해 박 대통령이 비명 횡사하자, "자주 국방 시도로 미국의 이해를 거스른 것이 배경"이란 분석이 혼돈 속에서도 설득력을 얻었다.

어쨌든 이후 '자주 국방'은 금기(禁忌)처럼 외면되고 잊혀진 구호가 됐다. 한미 동맹이 회복되고 미국 무기 도입에 의존한 군현대화는 한층 대규모로 계속됐으나, 자주 국방 달성 시기는 한미 정치·군사 지도자들에 의해 거듭 뒤로 미뤄졌다. 박 대통령 때는 80년대 초반이던 것이 5공에서는 90년 대 초, YS 때는 90년 대 후반, DJ 정부의 국방개혁 5개년 계획에서는 2010년으로 잡혔다. 미국 학자 셀리그 해리슨은 "자주 국방을 영원히 이루지 않는 것에 이해가 일치하는 세력이 한미 양국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새 세대 민주·진보 세력을 대표하는 노 대통령이 30년 가까운 공백을 깨고 자주 국방을 공개 표방한 사건은 역사의 아이러니와 감회를 함께 느끼게 한다. 미국의 세계 전략 변화에 따라 안보 불안과 국론 분열에 휩싸이는 악순환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는 그의 취임 후 대미 자세에 비춰 가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자주 국방 구호가 위장적인 것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미 자주를 바라는 국민 정서에 영합하면서, 다른 한편 미군 재배치 등에 따른 전력 공백을 메운다며 미국 무기 수입에 세금을 쏟아 붓는 명분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주 국방을 지향하는 경우에도 보수 세력의 반대는 완강할 것이다.

다가올 논란과 관련, 미국내 주한미군 철군론자들의 주장이 다른 무엇보다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적· 군사적 거인으로 성장했고, 이제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는 정치적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혼란스런 논쟁을 준비하는 이들이 먼저 경청해야 할 충고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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