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귀국했을 때도 그랬지만,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도 나를 견제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많아 대학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다.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구걸하다시피 돌아다녔으면 몰라도 모셔가기만 기다렸기 때문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하도 기가 막혀서 제자들에게 하소연을 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나, 아무데도 오라는 곳이 없어." "선생님, 취직은 단념하세요. 모든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타날까 봐 겁을 먹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그런 대답이 기억에 생생한데 미국에서 11년 만에 돌아오니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 나는 낙원동의 낙원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날 박원석 덕성여대 이사장이 예고도 없이 찾아 와서는 덕성여대에서 일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여성 작가인 김모씨를 같이 데리고 올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이 학교의 미술학과에는 내가 작가로서 가장 아끼는 제자 최욱경이 학과장으로 있었다. 그녀는 열정적인 표현주의 추상화가로 우리나라 화단의 독보적 존재였다. 세련된 색채 감각은 그녀가 얼마나 섬세하고 대담한 화가인지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있는 덕성여대에 가는 데 마음이 더욱 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가자 최욱경과 새로 부임한 김 모 교수 사이에 심한 암투가 벌어졌다. 나는 그런 암투가 보기 싫어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최욱경의 비극이 일어난 것은 그 후 얼마되지 않아서였다.
최욱경과의 첫 만남은 1950년대 초 내가 이화여고에 재직했을 때로 그녀는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다. 내가 미술부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녀는 친구 여러 명을 이끌고 미술부에 제일 먼저 나와 점령하다시피 했다. 당시에는 어디에서도 석고 데생을 가르치는 데가 없어서 외부에서도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미술부에서는 중학생, 고등학생 차별 없이 지도했다. 그때 최욱경은 민병옥과 같이 공부를 했고 이들은 늘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밤낮으로 데생공부를 하면서 미친 사람들처럼 그림을 그렸고 실력도 뛰어났다. 하루는 홍익대 미대생들이 이들의 스케치북을 넘겨보면서 "우리 데생보다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내가 볼 때 민병옥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최욱경은 손재주보다는 감각이 탁월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민병옥은 미술지도자로서 자질이 보이고 최욱경은 작가로서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때 나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었다. 그 후 둘 다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는데 민병옥이 수석이고 최욱경은 차석이었다. 이는 서울대 교육이 당시에 작가적 감각보다 손재주를 우선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졸업 때는 민병옥이 서울대 전체 수석, 최욱경은 2등을 했고, 두 사람은 미국 유학도 동시에 갔다. 거기서 민병옥은 미국인과 결혼해 집에 들어앉았지만 최욱경은 놀랄 만한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최욱경 만큼 감각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로 내면의 열정을 표현했던 최욱경은 남해의 바다, 꽃, 산 등을 집요하게 탐구하고 독특한 추상세계를 구축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렇게 멀리서나마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그녀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됐다는 게 무척 좋았다.
그런데 나와 같이 덕성여대에 부임한 김 모 교수는 별 실력도 없는데도 마치 자기가 여왕인 것처럼 최욱경을 내리 누르고 나에게도 참을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그것이 내가 사표를 낸 직접적 동기였다. 이때 억지라도 남아서 최욱경을 감싸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그녀는 건강 체질이 아니었는데도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며 하루에 커피를 20잔 이상 마셨다. 몸에 안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즐기는 데다 낭만적이고 염세적인 기질이 강했다. 그녀는 참으로 순수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깊은 바다에 빠진 듯한 고독과 폭발하는 화산과 같은 강렬한 색채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어떻든 그녀는 몸은 왜소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깊고 넓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85년 그녀는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지금 그녀는 가고, 그녀를 기념할 만한 미술관도 없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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