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복고풍 양복을 입은 남자와 촌스러운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수줍게 웃고 있다. 교사인 폴과 간호사 엘렌의 결혼 사진이다. 사진 애호가인 폴은 많은 사진을 찍었다. TV가 귀하던 시절 문을 연 동네의 'TV 클럽' 매표소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 삐걱거리는 나무 책상에 앉아 잉크를 찍어 필기하는 아이들….2003년 그 시절 손뜨개 옷을 입고 뒤뚱대던 폴의 아들 장 피에르도 나이를 먹었고 그의 아들 줄리앙도 어엿한 청년이 됐다. 줄리앙은 할아버지가 찍어둔 해묵은 사진들을 들춰보며 그 시절을 더듬어간다. 요즘 프랑스 방송에서는 한 가족의 삶을 통해 1945년부터 75년까지 현대 프랑스의 황금기 30년을 되돌아 본 '마르탱가(家)의 사람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공영TV의 교양 채널 France 5에서 8월3일부터 6주 동안 매주 일요일 오후 4시30분에 방송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이른바 '다큐 픽션'이다. 폴을 비롯한 모든 등장 인물이 허구의 산물이고, 심지어 셍 프레시라는 마을도 가상의 공간이지만, 46년 드골의 퇴임에서 73년 원유 파동까지 프랑스가 겪은 역사적 사건을 다큐멘터리 못지 않게 생생하게 그린다.
이 작품이 방송 첫 회부터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완벽한 자료 수집 덕이다. 총 여섯 시간의 프로그램을 위해 제작진이 훑은 자료가 1,000여 시간 분량이고, 5년 단위로 구성되는 1회 분의 고증 화면만도 600장면에 달한다. 자료 수집, 플롯 구성, 다시 자료 수집으로 이어진 정밀한 작업을 거쳐 선택된 화면은 아마추어 사진, 기록 필름, 우리나라의 '대한뉴스'와 같은 영화관용 국민 뉴스, 광고, 현수막 등 다채롭다. 그 시절을 살았던 프랑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맞아, 저런 것이 있었지" 하고.
독창적인 기획과 치밀한 제작으로, 한 가족의 작은 이야기와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을 맛깔 나게 버무려 낸 '마르탱가의 사람들'은 시청자뿐 아니라 비평가들에게도 호평을 받고 있다. 이에 힘입어 다른 방송사도 내년 편성에서 수 편의 '다큐 픽션'을 기획중이다.
1950년대 초, 엘렌 할머니는 파리의 가전제품 박람회에 가서 냉장고라는 물건을 신기한 듯 열어보는 주부들을 만났다. 그는 "그래도 냉장고는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대신 남편은 내게 다리미를 사주었다"고 회상한다. 오랜만에 3대, 4대가 TV 앞에 함께 모여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나며 40도를 넘나드는 불볕 더위를 잊고 있다.
/오소영·프랑스 그르노블대 커뮤니케이션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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