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글·임인식 사진 김영사 발행·8,900원해져 너덜거리는 신발이 있다. 걸음을 놓을 때마다 벗겨진다. 비오는 날엔 빗물이 스며들어 흠뻑 젖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 운동화가 들려 있을까 싶어 매일 집 앞에서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호미, 낫, 간고등어 같은 것만 건네주었다. 어느날 어머니가 아이를 잡아끌었다. 장독대 뒤에서 운동화 한 켤레를 꺼내주었다. 모든 어머니들이 갖고 있는 숨겨둔 돈으로, 아이는 젖은 신발을 바꿔 신을 수 있었다. 소설가 김주영(64)씨의 첫 산문집 '젖은 신발'의 한 대목이다.
그 아이가 자라서 껑충한 청년이 됐다. 그렇게 서러웠던 신발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객주' '화척' '야정' '아라리 난장' 같은 소설은 신발로 땅을 밟으며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렸을 적 밑바닥이 닳고 닳을 때까지 신발을 신고 다녔던 것처럼, 김씨는 이야기 속 사람들의 신발 고무가 삭을 때까지 곳곳을 돌아다니도록 이끌었다.
김씨는 이 산문집에서 유년의 기억, 지금은 아득해진 50, 60년대에 대한 기억을 끌어낸다. 애옥살이에 지치고 시어머니 호통에 지기 펼 날이 없는 아낙네들이 목청을 한껏 돋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 우물, 색깔조차 비슷하지 않은 자투리 천을 잇대어 깁고 또 기운 누나의 치맛자락, 언제 허물어져 내릴 지 모르는 언덕바지 비탈길에 지은 오두막 같은 것들. 그가 정겹고 섬세한 문장으로 그리는 가난은 힘겹기보다 그리운 추억이다. 가난이 오히려 힘이 되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어느 날에는 어머니 몰래 쌀독에서 쌀을 훔쳐내고선, 너무 많이 꺼내왔는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훔친 생쌀을 콩죽같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해 지도록 씹어 삼켜야 했던 슬픈 기억이 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켜대는 통에 자리잡고 앉아 숙제하기도 수월치 않다.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나선다. 초원에 지천으로 깔린 잡초를 뜯다 말고 언제 엉뚱한 곳으로 달아날지 몰라 잠시도 송아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선생님이 머리를 깎으라고 했는데, 아이에게는 머리 깎을 시간도 없다. 좋아하는 여자애 앞에서 선생님의 꾸중 들을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해진다. 그 부끄럽고 갑갑한 감정이 자신을 어른스럽게 만들고 어엿한 남자로 성숙하게 하고 지혜롭게 만들어줬다는 것을 작가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떠나버린 모든 것은 손을 흔들어준 그 순간까지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러나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깨닫지 못했던 것일수록 소중하게 남는다." 김주영씨의 말이다. 아름다운 글만큼이나 다사롭고 소박한, 사진작가 임인식씨가 찍은 옛 풍경의 흑백 사진들도 함께 실렸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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