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발행·1만4,500원한문학자 강명관(부산대 교수)씨는 교보문고 뒤 피맛골에서 소주를 마시다가 조선시대에도 이곳에 술집이 있었을까 하고 좀 엉뚱한 상상을 했다. 등판에 문신을 새긴 조직폭력배가 굴비두름처럼 엮여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TV 화면을 보면서 조선시대 조폭을 떠올리고, 성 매매 뉴스를 보고는 조선시대 남녀의 성의식과 연애방법은 어땠을까 궁금해 했다.
이런 '작고 시시한' 데 대한 관심이 그로 하여금 역사에서 잊혀진 조선시대 비주류의 삶을 찾아 옛 문헌을 뒤지게 만들었다.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그 결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상놈 말똥이, 중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사람들이다. 지은이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개인 문집, 대한제국 시절 황성신문과 '백범일지'까지 두루 살펴 생생하게 보여준다. 책의 성격과 가치는 저자의 말에 잘 요약돼 있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 아니면 홍경래나 임꺽정처럼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영웅의 열전이 아니라, 그런 잊혀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 싶다."
평생 술과 도박으로 살다 간 탕자,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유흥가를 주물렀던 왈자, 투전에 날 새는 줄 몰랐던 도박꾼, 수백명씩 무리를 이뤄 관청을 습격하고 재물을 털던 도적떼 등 역사의 공식적 기록에서는 자취조차 흐릿한 사람들이 이 책에서는 왁자지껄 걸어 나온다.
군자의 나라를 자처하던 조선에서 고상하게만 비치던 양반님네들의 지저분한 뒷모습도 들춰낸다. 대표적인 것이 과거 시험의 타락상이다. 과거를 봐야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던 시절이라 너나 없이 과거를 봤는데, 시험장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험문제가 잘 보이고,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앞 자리를 차지하려고 온갖 무뢰배까지 동원해 몸싸움을 벌이느라 주먹질 발길질이 난무하고, 답안을 대신 써주는 전문가까지 버젓이 들어갔다니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이런 일이 어쩌다가 있는 게 아니라 흔했다고 한다. 정조 연간의 실록에는 이틀간 무려 21만명이 과거를 보고, 그 중 7만명이 답안지를 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응시자가 하도 많아서 제대로 채점하기도 어려우니 일찍 걷힌 답안지에서 적당히 급제자를 뽑았던 것이다.
조선 후기 유행을 선도한, 요샛말로 치면 오렌지족이라 할 수 있는 별감 이야기도 흥미롭다. 별감은 임금 바로 옆에서 왕명을 전달하고 왕이 쓸 벼루며 붓을 챙기고 궐문을 단속하는 등의 일을 하던 하위직인데, 이들은 온갖 사치를 다 부려 옷치장을 하고 기생과 악사 등 장안의 연예인은 죄다 불러 춤과 노래로 뜨르르하게 놀이판을 벌이곤 했다.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지은이는 단순히 옛날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다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비추어 오늘의 세태를 꼬집고 있다. 예컨대 타락한 과거장 모습에서 고시 열풍에 휩싸인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을 보는 식으로, 지나간 역사를 오늘과 잇는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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