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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빛은 물과 같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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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빛은 물과 같단다

입력
2003.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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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글 카르메 솔레 벤드렐 그림·송병선 옮김좋은엄마 발행·8,000원

'빛이 쏟아진다'는 표현이 있다. 어둠을 재빨리 잡아먹으며 부드럽게 번지는 환한 빛. 요즘 같은 여름날 흰 벽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이른 아침의 햇빛이나, 초겨울 벼를 베어낸 빈 들판을 고운 비단자락처럼 덮는 석양 빛에 흠칫 놀라서 갑자기 딴 세상에 온 듯한 황홀감에 휩싸여 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빛은 물과 같다'는 말을. 빛은 그렇게 물처럼 흘러내려 우리 몸을 적신다.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남미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동화 '빛은 물과 같단다'는 빛의 마술로 독자를 홀린다. 빛이 방안 가득 폭포처럼 쏟아져 호수를 이루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배를 타고 논다. 가구들은 섬이 되어 흩어지고 장난감은 둥둥 떠다니고 어항 속 물고기는 뛰쳐나와 헤엄을 친다.

주인공은 바닷가 마을에 살다가 도시로 이주한 아홉 살, 일곱 살 두 소년. 부모가 영화를 보러 나가 집을 비운 사이, 마술 같은 모험이 벌어진다. 거실에 켜진 환한 불빛을 향해 "불은∼ 빛, 빛은∼ 물! 불은∼ 빛, 빛은∼ 물! 물아, 불아, 물처럼 흘러라∼." 라고 주문을 외우자 황금색 빛줄기가 물처럼 흘러들어 바닥부터 차오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멋진,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설정이라고?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마르케스의 거장다운 글 솜씨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이음매를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매끄럽게 넘나들고 있어 마술이나 환상을 믿지 않는 어른일지라도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빨려 들게 만든다.

32쪽 분량의 이 그림책은 글 못지않게 그림도 독특하고 환상적이다. 그림작가 카르메 솔레 벤드렐은 거실에 찰랑찰랑 빛이 넘실대기 시작하자 가구며 장난감이 살아나는 놀라운 사건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표범가죽 소파의 변신(그림)을 보라.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표범 한 마리가 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쳐다본다. 거실은 어느새 화려한 꽃과 앵무새가 등장하는 열대 밀림이 된다. 마르케스의 글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러한 정경은 벤드렐의 상상력이 빚어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두 아이는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연다. 그런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빛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아이들은 빛의 바다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움직임을 멈춘 채 둥둥 떠있는 아이들 옆으로 상어와 금붕어가 한가롭게 헤엄을 친다. 아이들이 모두 죽은 것일까. 마르케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장 그림에 답이 숨어 있다. 아빠가 아이들 방의 불을 끄고 나간다.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동화는 현실로 돌아간다. 어른들은 모르는, 혹은 잊어버린 환상의 세계는 아이들만의 비밀로 남는 것이다.

이 책은 출판사 좋은엄마가 펴내는 라틴 어린이 환상동화 시리즈의 첫 권이다. 이 시리즈를 통해 그 동안 영미·유럽에 쏠려있던 국내 그림책 문화의 지평을 스페인과 남미권으로 넓혀 다양한 책을 소개하겠다고 하니 자못 기대가 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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