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자식아, 일본군이 죽는 법이 어디 있어? 내일 선생님께 말해 버리겠어. 네가 일본군을 죽였다고 말이다. 일본군은 절대로 죽는 법이 없어.""임마, 먼저 본 사람이 총을 쏘면 죽기로 약속하지 않았어?"
"너 정말 일본군이 죽는 거 봤어? 절대 죽지 않아. 그것도 몰라? 선생님께 물어봐."
아직 세상을 알기에는 어린 철부지 소년에게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말 타고 번쩍이는 총칼을 멘 일본군이 좋아 보이기만 하고 징병 나간 삼촌은 사람들에게 영웅처럼 떠받들린다. 아이에게 전쟁은 항상 미군이 지고 일본군이 이기는 놀이일 뿐이다. 그러나 삼촌은 전사하고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그 동안 아이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일본군은 힘없이 떠나고 삼촌의 유골이 모셔졌던 신사는 불에 타버린다. 학교 교무실 앞 복도에 자랑스럽게 걸려있던 삼촌의 사진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신발 자국까지 나있다. 이제 세철이는 바뀐 세상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후 혼란기, 한국전쟁을 각각 시대 배경으로 한 '전쟁놀이' '그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못자국'(현길언 글, 이우범 그림, 계수나무 발행)은 주인공인 제주 소년 세철이의 성장과정을 그린 3부작이다. 해방 후에도 세철이의 전쟁놀이는 계속된다. 4·3 사건 때는 공비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 괴뢰군이 늘 지는 나쁜 편이다. 그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면장이던 아버지는 공비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고등학생 형은 국군에 지원했다가 한 쪽 다리를 잃는다. 해방 전에는 적군이었던 미군이 한국전쟁 때는 우리 편이 되지만 서울에서 피난 온 친구 유원이는 피란 길에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를 잃는다. 도대체 이제 내 편과 네 편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 사춘기에 들어서는 세철이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른의 시선으로 시대를 평가하여 옳고 그름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보다 커나가는 아이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이 세 권의 책은 격변의 시대를 살면서 나의 위치를 정하고 주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정체성 찾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낮은 목소리로 그려내 더욱 울림이 큰 이 책들을 읽다 보니 항상 일본을 '왜'(倭)라고 낮춰 부르던 부모님 생각이 난다. 해방 전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냈던 내 부모님의 경험은 어땠을까. 살아계실 때 더 많은 얘기를 들어두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가 생존해 있는 동안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 등 외국에서 살았던 그들의 기억을 모아 다양한 책으로 만들면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줄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대구가톨릭대 도서관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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