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2년 간의 기나긴 미국 생활을 끝내고 197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10년 넘게 미국에서 있다 보니 평생 살 게 아니라면 귀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게 아들 용진이었다. 내가 '고국을 그리는 용진이'를 그린 것은 이 해 가을 귀국하기 직전이었다.파리에서 돌아온 직후에 낳은 용진이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녔고, 친구도 대부분 미국 아이들이었다. 나는 아들이 미국에서 사는 게 자연스럽고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용진이가 대여섯 살쯤 됐을 때의 일이다. 밖에서 들어온 용진이는 "우리는 한국 사람인데 왜 한국에서 안 살고 미국에서 살아요?"라고 물었다. 미국인 친구들과 놀다가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 후 나는 아들을 볼 때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3학년 때 용진이를 고국 방문단 일원으로 한국에 보냈다. 한 달 간 한국을 돌아보고 온 용진이는 그 후로 밤마다 서울에 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수시로 한국에 가자고 성화를 부렸다.
나는 용진이에게 "한국에서는 무엇이 좋더냐"고 물었다. 용진이는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거리가 깨끗해서 좋았다"고 대답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표정이 내가 보기에도 애처로웠다. 아이가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고국을 생각하며 잠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캔버스 옆에 앉혀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만일 용진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었다면 그런 정감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미국에 건너간 아이가 사춘기가 되어 고국을 그리워하는 걸 어떻게 표현할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니 모든 구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나는 용진이에게 흰색 한복을 입히고 손에는 고유 악기인 단소를 쥐게 했다. 배경은 용진이가 그리워하는 조국의 산천으로 잡았다. 고향산천을 뒤로 하고 앉은 아이, 자기가 태어난 곳을 잊지 못해 밤낮으로 그리워하는 한국인을 담으려고 했다.
일단 구상부분을 그리고 위쪽 화면에는 용진이가 고국을 찾았을 때 내려다 본 한국의 풍광을 형상화했다. 옆에는 우리나라의 초가집이 현대적인 건축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아래 화면에는 우리나라 5000년 역사를 나타내고자 했다. 이러한 표현은 하모니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무렵 가정에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느껴졌다. 나는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가족을 미국에 남겨 놓고 미국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평소 습관대로 용진이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용진이 엄마가 용진이를 살짝 불러내더니 그날로 사라졌다. 나는 용진이 엄마와의 결혼 생활이 끝이 났음을 느꼈다. 초대전 준비를 하고 컨테이너에 그림을 집어 넣고 열쇠를 잠그면서는 미국 생활도 그렇게 끝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를 받아 거창하게 개인전을 끝냈지만 내 마음은 허전했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화단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나는 완전히 외톨이였다. 그 동안 잊혀져 있던 나의 작품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몰려 왔지만 그림을 사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반면에 내 작품을 혹평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것은 전시장에 찾아온 화우들의 얘기와 태도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지만 한국에 다시 돌아와 처음 알게 된 수집가 한 사람의 말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78년 전시 때 김 선생님 작품을 구입하기 위해 화가들과 함께 전시장에 갔으나 모두가 '이것도 그림이냐'고 해서 사지 않았습니다."
현대화랑 박명자 사장도 "김 선생님은 이제 무명화가나 마찬가지"라며 "옛날과 같은 그림 값으로는 팔 수 없으니 싸게 내놓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미국에서 몇 달씩 고생해서 만든 작품들을 그렇게 팔고 싶지 않아 거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가 그림을 잘 팔지 않는다는 소문이 났다. 이래 저래 나는 고국에서 정착하기가 힘들었다. 더욱이 부모님 곁을 떠나 일본으로 유학 갔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영영 이산가족이 된 나로서는 혼자서 지낸다는 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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