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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법원 연공서열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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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론]법원 연공서열이 문제다

입력
2003.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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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판결문으로 말한다." 세간에서 네 번째 사법파동으로 부르는 이번 대법관 인사파동에서조차 이 말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에 은폐된 사법권력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판결문으로 말하는 법관은 정녕 누구인가. 법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재판관인가 아니면 대법원의 선례를 자동적으로 반복하는 복화술사인가. 또한, 이 판결문의 말이 담아내어야 하는 것은 국민의 정의감정인가 아니면 사법부의 폐쇄회로 속에서 대량 생산되는 그들의 법률인가.법원 내외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는 이번 파동은 대법관 인선의 문제를 넘어 판결문이 말하지 않는, 혹은 말하지 못하는 우리 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철저한 관료시스템을 구축하고 법관엘리트주의로 무장한 채 그들만의 권력회로를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 법원의 구조적 문제가 그것이다.

우리 법원제도는 일제가 만든 법관관료주의의 선민적 체제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현 교육체제가 요구하는 소위 '모범생'들을 선발해 곁눈질을 못하도록 하는 법관으로 양성하고 이들을 철저한 연공서열주의로 관리하는 체제가 우리 법원제도의 골격을 이룬다. 입시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법대 가고, 법대에서 규격화된 고시공부에 전념해야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는 좋은 성적 받아야 판사로 임용되고, 판사가 되어서는 '조직논리'에 충실해야 복잡다단한 승진 사다리를 향한 낙점을 받는, 구조적 아집에 빠져 있는 것이 지금 우리 법원의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법관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체제 내에 확립된 법률도그마를 전달하는 것이 최선의 가치가 된다. 일반인의 법감정이 하급심판결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인식이 법원으로 하여금 사회의 변화와 다양성을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타당한 판결문으로 말하는 것을 가로막고 상급심의 선례만을 복화술사처럼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법원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는 여기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엄격한 서열구조를 따라 일사분란하게 구축되는 조직의 통일성이 어떠한 내부적 오류도 허용하지 않게 한다는 자기확신의 표현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상급판사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하급판사의 이탈을 막는 수단이자 대외적으로는 법원조직의 완결성 혹은 폐쇄성을 확보하는 방벽이 되기도 한다. 사법개혁의 요청에 눈 감은 채 대법원장의 전권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인사파동 역시 이런 구조의 잔영에 불과하다. 인사자문위원회에 외부인사(실제 그 외부인사들 역시 모두 법조인이다)가 위촉된 것조차 커다란 파격으로 여길 만큼 조직의 경계와 위계에 집착하는 우리 법원이 가지는 관료주의의 고질적 징후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물론 이번 사건만 본다면, 그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 권한으로 교정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미봉으로는 연공서열주의에 함몰된 우리 법원의 구조적 문제를 치유할 수 없다. 법조관료주의를 맹종하는 우리 법조양성제도의 한계를 감안할 때 대법관 몇 명의 인사로서 우리 사법부의 보수성향을 바로 잡거나 대법원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철저한 계층구조에 눌려 법관이 '자신의 판결문'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우리 법원 구조 자체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정작 절실한 것은 사실상 다단계의 계층구조와 이를 따라 진행되는 연공서열식 승진제도의 혁파이다. 이번 인사파동에서 법원측은 '사법부의 독립' 운운하면서 방어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사법부의 독립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법원내부적 개혁을 통한 진정한 '법관의 독립'이라는 점을 예의주시하기 바란다.

한 상 희 건국대 법대학장·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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