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아버지는 어부였다'로 시작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정확한 기억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글 또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쓰게 된 글이었을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다 마치고 출판사로 전송하는 순간에도 나는 첫 문장을 이렇게 고치고 싶었다. 내 아버지는 어부였다.평생 고깃배를 탔던 할아버지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육지로 올라와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았다. 하지만 육지 멀미를 하듯 서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돛을 올리고 닻을 내리기를 수만 번, 손바닥은 밧줄을 쥘 공간만큼만 남겨둔 채 굳은살이 박혀 오므라들었다. 소금기 가실 날이 없었던 살갗으로 수천 일, 데일 듯한 태양이 그대로 내리 쪼였다. 할아버지의 등은 사포처럼 거칠어졌다. 만년에는 수많은 땀구멍에 고름이 찼다. 방안에는 피고름을 짜낸 휴지가 널렸다. 그 고약한 냄새는 나중에 동생들에 의해 할아버지표 냄새가 되었다.
'내 할아버지는 어부였다'와 '내 아버지는 어부였다' 사이의 간극이 너무도 크다는 걸 난 글을 쓰기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고단한 뱃일에 지레 겁을 먹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 서울역에 내리는 순간 다시는 섬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작심으로 사투리를 버렸다. 아버지의 외모는 서울내기처럼 희고 곱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사람의 벌어진 사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서 한평생 어부 일을 업으로 삼았던 사내와 잠시 잠깐도 어부로 살기를 싫어했던 그 아들의 불화를 지켜보았다. 섬과 고깃배들로부터 한참 떨어진 서울에서의 생활도 그들 사이의 골을 메울 수는 없었다. 그들은 비린 것을 좋아하는 식성을 제외하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섬을 떠나오기 전까지 나는 가끔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부둣가로 나갈 기회가 있었다. 깊은 새벽, 고깃배에서 밝힌 전구알들에 눈알이 시었다.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진한 사투리로 욕설을 퍼부어댔고 전구알 너머에서도 누군가가 비슷하게 대거리를 해왔다. 부두에 정박한 배와 배 사이로 출렁이는 검은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원유를 따라놓은 것처럼 끈끈했고 벙커C유 냄새 때문에 멀미가 났다. 어둠 속에서도 배들은 폐선처럼 보일 만큼 낡아 있었다. 온종일 바다를 쏘다니다가 온 배에서는 온갖 냄새가 났다. 나는 할아버지의 등에 달싹 업힌 채 할아버지처럼 살고 있고 아버지처럼 도망갈 용기도 없어 고깃배를 물려받고 섬에 주저앉은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았다. 나는 눈을 꿈벅이면서 나무 궤짝에서 들끓어오르는 멸치떼를 보았다. 살아 있는 못. 멸치는 튀어오르면서 자꾸 궤짝을 벗어났다. 멸치는 못을 박듯 시멘트 바닥에 제몸을 부딪혀댔다. 나는 숨을 죽이고 할아버지의 스웨터를 움켜쥐었다. 검은 바다가 날 데리고 갈까 봐 무서웠다.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느냐는 당황스러운 질문에 이젠 익숙해졌다. 초등학교 2학년 작문 시간에 소년 잡지에서 본 동시를 생각나는 대로 베껴낸 것이 화근이었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 그 동시는 한 학기 내내 복도에 걸려 있었다. 키가 큰 아이들이 무조건 육상부원에 뽑히던 시절이었다. 그 동시 하나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문예반원이 되어야 했다. 방과 후에도 문예반에 남아 동시를 읽고 지도 선생이 그날그날 내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하곤 했다. 문예반 아이들은 종종 수업을 빼먹고 글짓기 대회에 나가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다. 그때 참고로 했던 글짓기 교재에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를 읽었다. 어느 학교 몇 학년이라는 것이 빠져 있었지만 나는 내 또래의 남자애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 남자애에 대한 애정과 재능에 대한 질투가 계속 문예반에 남아 있게 했다.
한동안 출판사에 근무했던 아버지의 이력을 끌어오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우리집은 옆집보다 책이 많았다. 출판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집안 여기저기에는 총천연색 팸플릿이 돌아다녔다. 둘째가 아무리 딱지를 접어도 없어지지 않는 양이었다. 아버지는 쓸모 없어진 팸플릿으로 외풍 심한 다락방에 도배를 했다. 자매 중 맏이인 내가 다락방으로 독립을 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내 눈앞에 펼쳐지던 광경이 아직 눈에 선하다. 바닥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이 온통 총천연색 활자들이었다. 허리를 굽히고 다락방에 올라서서 나는 그곳에 적힌 글들을 읽었다. 자리를 깔고 누우면 팸플릿의 활자들이 별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파스테르나크, 플로베르, 모파상… 낯선 이방인들의 이름을 천장 팸플릿에서 읽었다.
그렇다고 다 문학을 하느냐,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우물쭈물하다가 십여 년 째 아침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있다고 입을 뗀다. 기상 시간에 맞춰 자명종을 맞춰두지만 그 시간보다 1, 2분 먼저 일어나 자명종이 울리기 직전에 자명종을 꺼두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야 그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의 수면까지 방해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자명종의 건전지가 다 닳아 중간에 아예 시계가 멈춰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자명종 소리 대신 누군가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을 열어주기 위해 방문을 다가가 손잡이에 손을 댄 순간에야 방안에 우리 가족이 빠짐없이 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 현관문의 초인종을 누를 수는 있겠지만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제 시간에 일어났다.
'내 할아버지는 어부였다'로 시작하는 글을 쓸 때 나는 부끄러웠다. 왜 그때 비린내 진동하고 생선 내장과 대가리가 뒹구는 미끄러운 그 곳에 두 발을 대지 못했나. 그래서 나는 '내 아버지는 어부였다'라는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어부의 딸이라면 어부의 생에 어떻게든 개입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파리떼가 득실거리는 어시장에 심부름을 위해 발을 들여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허만하 선생의 산문집 '낙타는 십리 밖 물 냄새를 맡는다'를 읽다가 선생이 인용한 니체의 '우상(偶像)의 황혼' 중의 일부분에 밑줄을 긋는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눈에 침착성과 인내의 습관을 주어서 사물 쪽에서 친근하게 가까이 걸어오도록 눈을 길들이는 것이다.' '한 줄의 시를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도시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릴케의 글귀에도 밑줄을 친다.
본다는 것.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받고 나서 나는 여전히 몇 년 전처럼 '내 할아버지는 어부였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내 아버지는 어부였다'라는 문장에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나는 어부의 손녀였으므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중간쯤에 자리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한 사람이 얼굴을 돌리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얼핏 그 사람에게 내비치는 얼굴의 표정도 살필 수 있었다. 나에게 소설이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중간쯤에 서서 편견 없이 두 사람을 관찰했던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그 두 사람을 조금씩 이해했다. 할아버지의 작은 배가 성난 파도에 휩쓸리며 종이배처럼 간당거리는 그림을 나는 본다. 타기 싫은 고등어배에 억지로 떼밀려 육지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본다. 1986년 할아버지의 죽음을 끝으로 이 삼각 구도는 끝이 났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쓰는 사람' 이전에 '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 두 눈은 볼거리를 찾아 불안하게 흔들렸다. 대상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 망막에는 세상의 무수한 것들이 아주 잠깐씩 상을 맺을 뿐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물고기의 눈처럼 한번에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하려는 욕심에 시달렸다. 하지만 한 문장도 내게 고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나는 내 눈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오래 머물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빈다. 수십 켤레의 구두들이 뒤엉켜 있다. 나는 내가 시킨 해물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한 여자가 식당 안으로 들어선다. 생면부지의 여자인데도 나는 여자가 끌고 들어오는 무언가를 본다. 그것은 여자의 그림자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 나는 여자가 살아온 지난날들을 다 알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더 이상 여자는 낯설지 않다. 본다는 것. 나는 본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 약력
1967년 서울 출생
1992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풀' 당선 등단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 수염의 첫번째 아내',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등
동인문학상(1999) 한국일보문학상(2000)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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