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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9> 제자 누드모델 모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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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9> 제자 누드모델 모린

입력
2003.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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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서 하모니즘 작품에 매달리면서 즐겨 그린 소재는 역시 누드였다. 미국에 정착한 후 한때 추상 계열의 작품에도 관심을 가졌지만 하모니즘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는 다시 누드화를 그렸다. 내가 누드화를 그린 것은 누드의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표현하는 것이 하모니즘을 표현하는 데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할 때 누드 소묘는 기본 과목이었다. 나는 '실물 드로잉과 회화'(Life Drawing and Painting Class)'란 제목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매 학기 새로운 학생들이 신청을 해 강의실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드는 만인의 관심사인 듯싶다.

당시 누드 모델은 학교에서 주선해 준 전문 여성들로 두시간 반 정도 포즈를 취해주고 갔는데 하루는 오기로 한 누드 모델이 수업이 시작돼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본 이론 강의를 마치고 실습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가 학생들은 동요했고 나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학생들 사이를 한번 휙 둘러보고 나서 물었다.

"누가 모델이 돼 볼 사람 없나요?"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반응을 살폈는데 학생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키가 늘씬하고 이목구비가 아주 선명한 학생이었다. 그 학생이 바로 모린이다.

미국의 미술학교에서는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직접 누드 모델이 돼 보기도 한다. 하지만 항상 같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린은 스스로 모델이 됐다. 스스럼 없이 옷을 벗은 모린의 몸매는 늘씬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몸매와 미모는 찬탄을 자아냈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했다. 이날 누드 실기 수업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도 열띤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그 후 모린을 개인 화실로도 불렀다. 수업시간에 누드 모델이 됐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에서라면 벌써 두 사람이 사귄다는 둥, 어떻게 사제간에 그럴 수 있느냐는 둥 온갖 말이 많았을 터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화실에서 그녀는 더욱 대담해졌다. 그녀가 취하는 포즈는 언제나 신선하고 도발적이어서 나의 미감을 사로잡았다. 나는 선 하나, 점 하나도 정성을 들여 그렸다. 무엇보다도 모린은 미스 월드 뺨치는 아름다운 미모로 내가 원하는 포즈를 충실하게 취해주었다. 그녀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나는 그녀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고, 그녀 또한 나의 요청에 성실하게 대했다. 구상화면에 그녀의 표피적 아름다움을 옮겼다면, 추상화면에는 그녀의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갈등을 형상화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흘렀다. 당시 그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금도 그때 그녀에게서 받은 미적 감흥이 생생히 되살아 난다.

1977년 하모니즘을 선언하며 내놓은 누드화 상당수가 그녀를 모델로 해서 그린 작품이다. '모린의 나상'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들이 바로 초기 하모니즘의 대표작들이 됐다. 나로서는 또 한번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는 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그 여성 또한 나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도와줄 때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파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이 자클린 등의 헌신적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하모니즘 작품은 제자 모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그 의식 세계를 화폭에 담는 동안 나는 그들과의 정신적인 합일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내 창작의 원동력이었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 누드의 선이 아름답다고 한다. 사실 내가 누드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모린과 같이 매혹적인 여체로부터 그러한 선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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