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함께 시인을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시 습작에 한창이던 스물 두 살 부산 청년이 동인지 하나를 들춰보다가 '괜찮아 뵈는' 시 한 편을 만났다. 시 쓴 사람과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수소문했다. 그렇게 만나 3년 여 열애 끝에 결혼했다. 몇 년 뒤 신춘문예에 당선된 남편은 상금으로 아내에게 타자기를 사줬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느라 시인의 꿈을 접었던 아내가 소설을 쓰고 싶다고 얘기했던 것을 잊지 않아서였다.시인 최영철(47)씨와 소설가 조명숙(45)씨 부부가 시집 '그림자 호수'(창작과비평사 발행)와 소설집 '헬로우 할로윈'(문학과경계사 발행)을 함께 펴냈다. 남편에게는 일곱번째 시집, 아내에게는 첫 소설집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전부터 부산 문학지에서 필명을 날린 시인이던 남편처럼, 아내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당선돼 지역에 이름을 알린 뒤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중앙문단에 나왔다. 부산에 살고 있는 두 작가가 책 출간을 맞아 13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아내가 오랫동안 스스로 단련해온 걸 지켜봤다.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기쁘다"(최영철) "남편이 진솔하고 꾸밈없는 시를 쓴다는 믿음이 한결같다. 세상에 시인이 네 남편 뿐이냐는 타박을 들을 정도다(웃음)."(조명숙)
아내의 말처럼 새 시집의 시편은 정직하다. '창비 시선'이 25년 만에 장정과 판형을 바꾼 뒤 첫번째로 낸 시집이다. 그런데 시인의 목소리가 순하지만은 않다. '아무데나 칙 그을 성냥만 있다면 랄라 세상은 금방 타오를 불쏘시개라네'라는 성냥공장 아가씨의 노래에('랄라 룰루'에서), '분질러지고 곡예를 한 862원은 파란만장한 세파를 용케 넘어/ 쉽게 용해되지 않을 것이다 쉽게 휘발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통장에 찍힌 돈 862원에('862원'에서) 악다구니가 서려 있다. '수양버들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 단잠에 빠지려는 물의 지느러미를/ 자꾸만 흔들어 깨운다/ 잠들지 마 잠들지 마'('그림자 호수'에서)라고 읊듯 시인이 붙잡는 서정의 풍경은 놀랍도록 부드럽지만 시인이 부대끼는 사람의 일상은 비루하다.
등 굽은 이웃에 눈길을 맞추는 남편처럼 아내도 그늘진 곳에 있는 보잘 것 없는 존재들에 초점을 맞춘다. 흔한 문학강의 한 번 듣지 않고 홀로 창작을 공부해온 그이다. 외롭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남편이 스승이고 친구"라면서 환하게 웃는다. 소설집의 표제작 '헬로우 할로윈'에서는 베트남전쟁 참전 뒤 고엽제 후유증으로 살이 썩어가는 아버지의 고통을, '燈(등)'에서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떠맡은 뒤 바퀴벌레를 죽이면서 숫자를 세어나가는 딸의 심리를 그린다.
조씨는 정신지체 장애인, 난쟁이 등 상처 있는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작가가 배운 게 아니라 살아온 것으로 쓰여진 얘기다. 중심 아닌 변두리에서 내핍한 삶을 이야기로 쓰기. 작가는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믿는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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