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유럽을 여행하던 때의 일이다. 기차에서 내리려고 짐을 챙기는데 검은 필름 통이 하나 내 의자 위에 떨어져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다 찍은 필름이 들어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걸 챙겨 기차에서 내렸다. 여행은 한 달도 더 계속되었다. 우리나라로 돌아오자마자 열 통도 넘는 필름을 현상소에 맡겼다.며칠 후에 가보니 이상한 사진들이 있었다. 처음 보는 데가 찍혀 있었다. 여길 언제 갔더라? 몇 장을 더 넘기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십대 소녀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옆 자리에서 왁자하게 떠들다 내린 한 무리의 여행자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찍은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유럽의 곳곳에서 신나게 먹고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 한 무더기의 여행 사진에서 여행자의 고독이나 외로움, 쓸쓸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밝고 명랑했다. 그런데 그 밝고 명랑한 사진들을 따로 모아놓으니 못 견디게 쓸쓸했다. 사진들 속에서 소녀들은 엉뚱한 동양 남자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기억을 몰래 점유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다. 다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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