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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6> 미국 대학교수로 살아 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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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26> 미국 대학교수로 살아 남기

입력
2003.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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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나는 4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 미술계 중진으로 국내에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선진국에서 새로운 예술 흐름을 맛보고 독창적 작품세계를 찾아보고 싶었다. 국내 화단의 답답한 분위기와 풍조는 미국행을 부추겼다. 무엇보다 나를 견제하는 사람들, 실력보다 연줄에 좌우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다행히 66년부터 어느 정도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그 해 12월에 연 고별 개인전은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미술품 구입은 수집용보다는 신축 건물의 사무실 장식용이 많았다.

아무튼 이때 마련한 돈은 미국 정착자금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나는 9월 신학기부터 시작하는 수업을 위해 일찌감치 미국에 도착했다. 당시 미국은 60년대 초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폈던 문화예술부흥 정책이 열매를 맺던 때였다. 61년 취임한 케네디 대통령은 외국문화·예술인에 대한 이민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많은 화가들이 미국으로 몰리면서 50년대 절정기를 맞았던 파리 화단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반대로 뉴욕 화단은 급격히 부상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 문화계가 정치바람을 타고 이리 저리 날려 다니는 역사적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는 무어 아츠 칼리지 초빙교수로서 회화와 드로잉, 데생 등을 가르쳤는데 미국의 미술교육 현장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무어 아츠 칼리지의 수업방식은 겉보기에는 합리적이고 자율적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미국의 미술 교육방침이 학교에서는 기본 교육만 하고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교수가 직접 새로운 미술을 개척하고 학생들에게 그대로 따라 하게 했다. 예를 들어 한 교수가 기하학적 추상을 하면 학생들도 모두 그에 따라야 했다. 미술학교는 학생 스스로 창조적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창의성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교수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거나 어느 방향으로 유도하려고 하면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발상을 막아 결국 학생들의 장래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인 미국의 대학교육조차 이런 모습이니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76년에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대학에서 그런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전시장을 돌아 보니 학생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화풍과 기법으로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학생들에게 선생님 그림을 모방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무어 아츠 칼리지에서 미술과장이란 사람 때문에 또 한번 놀라야 했다. 그는 내가 추상화를 그리지 않는다고 시대에 뒤떨어진 작가로 취급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 미국 화단은 추상화가 휩쓸고 있었다. 따라서 화단이든 대학이든 추상 일변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극사실주의와 팝아트 등이 등장한 것이다.

나는 무어 아츠 칼리지를 1년 만에 그만두고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는 명문 펜실베이니아대에 속한 학교로 여기서 실기를 배우고 미국 역사와 미술사, 영어강좌 시험을 통과하면 펜실베이니아대 미술과 출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곳은 무어 아츠 칼리지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전임교수가 없고 강사만 40여명이 있었는데 학생들은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강사에게 그때그때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작품 하나를 놓고 여러 강사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으니 어느 한 선생의 영향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포토 리얼리즘(일상 현실과 소재를 세밀하게 그리는 유파)부터 추상미술에 이르기까지 미국 화단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내 미술교육의 이념은 크게 달라졌다. 교수가 자기를 강조하지 않고 학생의 작품동향을 살펴 그 학생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 작품도 미국에 가기 전 반추상까지 이르렀다가 미국에서는 차츰 완전 추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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