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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파타고니아 특급열차

입력
2003.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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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세풀베다 지음·정창 옮김 열린책들 발행·7,500원100만 명이 넘는 칠레인이 조국을 떠났다. 권력에 저항하다가 추방된 사람도 있었고, 가난하고 비참한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망친 사람도 있었으며, 잘 사는 북쪽 나라(미국)의 풍요로움에 유혹돼 떠난 사람도 있었다. 루이스 세풀베다(54)가 '길고 허약하고 병든 조국'을 떠난 것은 첫 번째 이유에서였다. 많은 칠레 지식인처럼 그 역시 피노체트 정권에 항거해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수감됐으며, 국제사면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 뒤 망명 길에 올랐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떠돌다가 1980년 유럽으로 발길을 옮긴 그는 이제 스페인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21세기 소설 문학을 이끌어갈 작가'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장편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에 세풀베다의 삶이 담겼다. 고단하고 피로했던 삶 이야기를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들려주는 작가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때로는 웃음도 스며 있다.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는 열한 살에 새끼손가락을 건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가는 여행길이다. "약속해라. 바로 여기에 가겠다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치면서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위대한 여행의 초대장이라면서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책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주셨다. 할아버지는 그의 어린 시절의 전부였다. 파업하러 간다는 손자의 얘기를 듣고 감격스러워 하신 분이다. "내 손자놈이 파업에 나간다니… 그놈은 필시 내 피를 물려받은 게 틀림없어."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읽으면서 자라난 아이는 청년이 되어 가장 빛나는 젊음의 942일을 칠레에서 제일 끔찍하다는 테무코 교도소에서 보냈다.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이 150㎝인 정사각형에 사방이 시멘트 벽인 지하감방은 '상자방'으로 불렸다. 일주일만 지나면 자신의 배설물까지 뒤섞이고 마는 은밀한 공간에서, 발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한 뒤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혀로 발가락을 핥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감옥을 나온 작가는 "그곳의 인간 백정들을 잊지 않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담백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아르헨티나 엘 투르비오 마을에서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를 탄다. 대서양 연안 리오가예스고스에 도착하는 남극의 철마다. 기착지 하라미요역에 걸린 시계를 본다. 9시28분. 그 시간은 파타고니아의 상처다. 자유조합체 '소비에트'를 결성하고 지주들에 대항한 소작농을 향해 아르헨티나 정부가 발포한 시간이다. 시계는 진압군의 학살의 총알에 멈춰버렸다. "그동안 수없이 고쳤죠. 하지만 고치면 뭘 합니까? 그때마다 누군가가 그 시간으로 되돌려 놓는걸요." 그곳 사람들은 상처를 잊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역사의 잘못을 오래 기억하려고 한다.

세풀베다는 유네스코의 기자로 전세계를 다니면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글로 옮겼다. 그의 풍부한 여행 경험이 '파타고니아 특급열차'를 '기행문' 이상의 것으로 올려놓는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발걸음에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사건과 칠레의 상처투성이 역사, 아름다운 남미의 풍경과 자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삶이 묻어난다. 그것은 오직 일어나 앞으로 걸어나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체험의 목소리다. "이 땅에서 우리는 행복한 존재가 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구도 거짓말을 속임수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함께 출간된 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에서도 세풀베다는 이렇게 몸으로 배운 자연과 인생의 교훈을 일러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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