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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뽀뽀상자

입력
2003.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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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등 지음·임미경 옮김 문학동네 발행·9,800원촉촉한 뽀뽀, 메마른 뽀뽀, 살며시 빨아들이는 뽀뽀, 슬쩍 스쳐가는 뽀뽀, 달콤한 뽀뽀, 짭짤한 뽀뽀, 쪽쪽 소리를 내는 뽀뽀, 소리없이 얌전히 하는 뽀뽀, 끈적끈적한 뽀뽀, 깃털처럼 가벼운 뽀뽀…. 뽀뽀라는 말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관능적'이라는 형용사마저도 '뽀뽀' 앞에 놓이면 얼마나 유쾌한 표현이 되는지. 아빠는 골동품 가게에서 뽀뽀상자를 샀다. 단추를 누르면 뽀뽀가 하나씩 튀어나오는 볼록한 상자였다. 아픈 아기가 나으려면 뽀뽀로 몸을 덮어줘야 한다는 의사의 처방 때문이었다. 아기를 안아주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뿌루퉁한 아빠는 아이가 뽀뽀상자를 아주 좋아하는 게 다행스럽다. 그런데 어느날 아빠 잘못으로 작은 뽀뽀들이 상자에서 쏟아져 날아가버렸다. 아빠는 이제부터 나비채를 들고 뽀뽀들을 찾아와야 한다. 다섯 시간이나 헤맨 끝에 찾은 건 겨우 뽀뽀 세 개. 연방 쭉쭉 빠는 망측한 소리를 내는 뽀뽀, 마부가 휘두르는 채찍처럼 찰싹 스치는 뽀뽀, 내려앉는 곳마다 축축한 자국을 남겨놓는 침 흘리는 뽀뽀. 아기가 입원한 병원으로 돌아오는 아빠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아기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변하고 숨이 잦아든다. 아빠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목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소설 '뽀뽀상자'의 이야기다.

소설집 '뽀뽀상자'는 에이즈로 고통받는 어린이와 가족을 돕기 위해 프랑스의 어린이에이즈보호연대가 기획한 것이다. J M G 르 클레지오, 파울로 코엘료, 파스칼 브뤼크네르 등 작가 17명이 동참한 이 기획은 '세계적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최고의 재능을 발휘한 소설집' '기발하고 참신해서 읽지 않고는 못 배기는 짧고도 아름다운 17개의 이야기' '용기, 경탄, 혹은 끈기와 같은 미덕의 가치를 담고 있는 소설들'이라는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다. 공쿠르상 페미나상 르노도상 등 유수 문학상을 수상한 이들 작가들에게 주어진 주제는 '어린 시절'. 디즈니, 비틀스 등 작가가 아이였을 때인 1960년대 문화 아이콘(마르크 랑브롱 '60년대의 대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지혜로운 짧은 이야기들(파울로 코엘료 '하느님이 어머니를 창조하시다'), 서구 지성사의 어린 시절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젊은 세계'에 관한 에세이(르 클레지오 '새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어떤 생각') 등 저마다의 사유의 빛깔로 빛나는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무엇보다 가슴을 다사롭게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맑은 심성을 그린 글이다. 진실된 사랑의 뽀뽀를 소망하는 아기(파스칼 브뤼크네르 '뽀뽀상자'), 고결한 줄로만 알았던 선생님이 '여자'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면서 배신감을 느끼는 꼬마(알렉상드르 자르댕 '선생님은 여자'), 마음의 성장통을 앓으면서 삶의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는 사춘기 소녀(낸시 휴스턴 '작은 낙원'), 여자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뚝딱뚝딱 우주선을 만드는 개구쟁이 소년(다니엘 피쿨리 '내 사랑 라이카'), 착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나무 속 여신을 만난 염소치기 소년(크리스티앙 자크 '나무 속의 여신')의 마음. 한 아이 한 아이 만나다 보면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닫혀진 마음이 살며시 열리는 것을 느낀다.

어떤 아빠는 아이의 성장이 더딘 듯해 초조하고 불안하다. 다급한 마음에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걸음마와 글자를 가르치며 닦달한다. 아빠가 서둘지 않아도 아이는 걷고 말하게 됐지만, 이제 아빠가 큰일이다. 갑자기 말을 못하게 된 것이다. 아빠와 아이 둘이서 보내는 어느날 오후 말 못하는 아빠에게 아이가 양팔을 펼쳐 펄럭이며 새처럼 날아다닌다. "따라해 봐, 아빠. 내가 하는 거니까 아빠도 할 수 있어." 아이가 아빠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묻는다. "아빠는 왜 나랑 놀아주지 않는 거지?" 자라는 게 늦는 듯해 속앓이를 시키던 아이가 날아다니면서, 아빠의 뺨을 쓰다듬는다. "가엾은 아빠." 막스 갈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에서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것을 불러낸다. 어렸을 적 크리스마스 이브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렸으며, 피터팬과 팅커벨이 창문을 두드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때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뽀뽀상자' 속 17개의 작은 이야기 뽀뽀들이 튀어나와 우리 볼에 입맞출 때, 한때 우리가 가졌던 아이의 마음이 마법처럼 되살아 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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