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이런 식으로 양보하면 내줄 게 없는 우리 중소기업은 죽으란 말입니까." "아무리 저금리 시대라지만 차라리 공장을 팔고 이자로 생활하든지, 서비스업으로 업종을 바꿀 생각입니다."힘과 권한이 비대해진 대기업 노조가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외국 기업들은 대기업 강성노조가 두려워 투자를 기피하고, 국내 기업마저 생산성을 웃도는 급격한 임금 증가를 피해 앞 다퉈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제조업 공동화(空洞化)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세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듯한 대기업 노조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관련기사 A5면
현재 우리 경제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노사관계 후진국'이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최근 내놓은 '2003년 세계경쟁력 연감'에 따르면 한국의 노사경쟁력 지수는 3.551로 인구 2,000만명 이상 30개 국가 중 30위를 기록했다. 49개국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2000년 44위, 2001년 46위, 2002년 47위로 최하위권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무원칙한 노사정책과 기업주의 부도덕성 못지않게,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만 과보호하는 노동법 체계가 후진적 노사관계의 주범이라고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조직력을 가진 대기업 노조는 '파업'을 무기로 갈수록 살이 찌고,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는 날로 빈곤해지는 양극화 현상이 노동현장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이 밝힌 전체 생산직 근로자의 노조조직률은 12% 선이지만, 중소기업은 4%에 불과하다. 특히 419개 대기업은 전체 종업원의 73% 이상이 노조에 가입해 있다. 국내 최대 사업장인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노조가 강력한 노동운동으로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사이, 그 부담은 협력업체 등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삭감으로 이어지고, 비정규직은 의료보험 국민연금 등 4대 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중소기업협동중앙회 이재학(李在學) 산업환경부장은 "중소기업 노동자의 실근로시간은 주당 55.9시간으로 대기업의 48시간보다 훨씬 길지만, 임금과 근로조건이 열악하다 보니 인력부족률이 12.2%에 달한다"며 "현대차 임단협 타결을 계기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근로조건 격차가 더욱 벌어져 제조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차이는 노동부의 '5월 중 임금동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종업원 5∼9인 사업장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500인 이상 대기업은 2001년 168.9에서 지난해 174.9, 올해 195.9로 2년 새 30%포인트 가까이 격차가 벌어졌다.
올해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인상률은 17.7%로 5∼9인 사업장(5.1%)의 3배를 웃돌았다. 반면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0개국 중 23위로, 미국의 48% 수준에 불과하다.
때문에 정부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정규직에 대한 과다한 고용보호 수준을 낮추는 방향으로 법 개정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으나, 양대 노총의 반발을 의식해 개정 수위를 놓고 고심만 거듭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원덕(李源德) 원장은 "기업의 지불능력이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대기업 노조가 많이 가져가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만큼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며 "임금이나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대기업 노조가 기득권에만 집착할 경우 고용불안이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는 만큼, 양대 노총도 전체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균형 있게 향상시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현대차 임단협 타결에 대해 내놓은 짤막한 논평은 다음과 같은 절박한 호소로 끝을 맺고 있다. "중소기업계는 대기업 노조도 국가경제를 함께 걱정하는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역할을 다해주기 바란다."
/고재학기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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