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엄마한테 어울리니? 달랑 1,000원이래." 이슬(6)이 티셔츠를 사러 온 엄마 이옥숙(35)씨가 아이 옷은 제쳐둔 채 옷걸이에 걸린 하얀 털 코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몸에 걸치자 모델처럼 한바퀴 팽글 돌아봤다. 박수를 짝짝 치던 이슬이도 "엄마 난 저 노란 거…" 하며 옷 선반을 가리켰다.손님들이 옷을 고르는 매장엔 곁에서 "어머 예뻐라, 딱 어울리시네요" 하며 부담스러운 공치사를 늘어놓는 점원도, 흐트러진 옷가지를 챙기며 눈을 흘기는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사지 않을 옷 정리하고 이용대장에 이름을 적는 사이 이슬이가 꼬깃꼬깃 구겨진 1,000원짜리를 모금함에 쏙 집어넣으면 "쇼핑 끝!"
경기 부천시 원미구 역곡2동 동사무소 1층 한쪽 6평 남짓 공간은 주민들이 옷 정리, 집 정리하다 버리기 아까워 기부한 생활용품을 모아 파는 곳이다. '판매원 아무개' 이름표를 달고 물건 파는 사람이 없으니 주민이 손님이고 점원이고 주인인, 이름하여 '무인 알뜰매장.'
올해 5월 초 문을 연 무인 알뜰매장은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몇 달 동안 머리를 싸맨 끝에 나온 아이디어다. 지난해 9월 동사무소 숙직실을 개조해 재활용품 가게 만들 때만 해도 '무인(無人)' 자는 무용지물로 여겼다. "버린 셈 치고 갖다 주는 물건이라도 훔쳐가면 안되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임시직 판매원을 뽑아 시급 2,000원에 매장 모양새는 갖췄지만 찾는 사람이 없어 매달 20만∼30만원 적자에 시달리다 다섯 달 만에 문을 닫았다. 그렇다고 아까운 물건 버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차에 "어차피 버리는 물건 누가 집어가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제 집처럼 드나들며 쓸만한 물건 가져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공감대를 이뤄 현재의 모습으로 거듭났다.
안쪽 벽면을 거울로 장식해 내부를 밝고 넓게 꾸미고 재활용품 수집 통이 있는 매장 앞엔 화단을 놓아 고운 향기로 채웠다. 가게 앞에 내건 '주민 스스로 운영하는 여러분의 재산… 정리정돈은 스스로…' 등 이용안내문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자 약속이다.
계산대엔 '모든 물건은 1,000원,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에게'라는 문구가 달린 모금함을 설치하고 재활용품 기증자 대장과 이용자 대장을 함께 놓았다. 기증자에게는 고마움을, 자발적으로 물건값을 지불한 이용자에게는 연말에 빨래비누라도 한 장 전하기 위해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루 평균 1만∼3만원의 돈이 모금함에 쌓여 지금까지 65만원을 모았다. 주민자치위 심재방(70) 위원장은 "판매원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손님도 늘고 매출도 늘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양심이 스며든 돈이니 함부로 할 수 없는 법, 연말엔 주변 동초등학교에 10명분의 장학금으로 전달하고 어려운 이웃도 도울 계획이다.
주민들이 영업시간(평일 오전9시∼오후5시) 내내 마음 놓고 교환할 수 있고 편하게 오가니 자연스레 동네 사랑방 역할도 하게 됐다. 윤선녀(68) 할머니는 "나 입으려고 샀는데 우리 영감이 남자 옷이래. 드라이크리닝까지 했는데 딴 걸로 바꾸러 왔다"며 "손주 녀석들 옷도 여기서 사서 선물한다"고 했다.
재활용품 매장이지만 파는 물건은 백화점 못지않다. 아동도서 교양도서 교과서 등 서적, 인형 등 장난감, 운동화 구두 등 신발, 핸드백 배낭 등 가방, 모자 스카프 지갑 쓰레받기 면봉 재생비누 등 잡화, 각종 의류가 선반 가득 진열돼 있다. 이 때문에 "버리기엔 아까운 게 많다"며 괴안동 한도동 주민들도 찾아오고 있다.
다음 목표는 무인 특산물 매장. 김효남(52) 부녀회장은 "경북 봉화산 청정 옥수수를 사다 같은 방법으로 팔 생각"이라며 "무인 알뜰매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천=고찬유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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