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프랑스 혁명기념일(7월14일)을 맞아 축제가 열렸다. 몽파르나스의 밤이 깊어지고 댄스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내 뒤에서 "무슈, 킴수"라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단골로 다니는 세탁소 주인 부부였다. 그들은 반갑게 다가와 자기 딸을 소개해 주고는 곧바로 가버렸다. 자클린이라는 이름의 그 여성은 이제 갓 스무살이었고 꽤나 미인이었다. 뒤에 물어보니 그녀는 이혼을 하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구하러 나온 길이었다.나는 그녀와 파티장을 신나게 돌아다니고 싶었으나 춤을 배우지 못한 나는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다가 파리에 온 한국 남학생을 소개해 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9층에 있는 내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자클린이 찾아왔다. 축제 때 내가 춤을 못 춰 다른 파트너를 찾아줬는데 그녀가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먼저 그녀를 껴안고 볼에 키스를 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구미에서도 여자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나는 당시 두 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여념이 없을 때였다. 하지만 작고 좁은 방에 여인이 찾아오니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자클린은 방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더니 내 침대에 걸터 앉았다. 나는 캔버스를 들여다보다가 그녀에게 모델이 돼 줄 수 있는지 어렵게 물었다. 그녀는 내 요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의외로 쉽게 응했다. 자클린은 나를 위해 포즈를 취한 후 "피곤하다"며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내가 고맙다는 인사로 키스를 건네자 자클린은 물에 젖은 솜처럼 찰싹 달라 붙었다.
그 후 그녀는 매주 한번 정도 우리집에 찾아왔고 나도 그림을 여러 장 그릴 수 있었다. 사실 내가 파리화단에서 이목을 끌며 많은 작품을 팔았던 두 번째 개인전은 이처럼 그녀의 헌신적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10호 정도 크기로 그려서 화랑에 내놓으면 몇 시간도 안돼 팔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자클린은 내가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당신은 주말에 무얼 하나요?" "주말이라고 특별히 할 일이 있나. 이렇게 그림이나 그리고 있지."
그는 "당신이 춤을 추지 못하니 댄스홀에도 갈 수 없고…" 하며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내가 개인전을 마치고 받은 돈으로 집을 사서 이사를 할 무렵 집 근처의 댄스홀에서 자클린이 남자와 같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약간 당황하면서도 옆에 있는 사람이 베트남 출신으로 자신의 약혼자라고 소개했다.
"아듀"하며 돌아선 순간 갑자기 삶이 초라해지고 패배감이 밀려 왔다. 다음날 나는 몽파르나스에 있는 댄스 강습소에 나가 당시 한창 유행하던 로큰롤을 배웠다. 그런데 한달 정도 배우니 나를 가르치던 여자 강사가 나와 춤을 추다가 다른 연습생에게 "이 사람하고 춤을 추면 내 몸이 날아갈 것 같아"라며 "콘테스트에 함께 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 정도로 내 춤 솜씨가 늘었던 것이다. 내게 이런 춤 소질이 있었는지는 나 자신도 몰랐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댄스홀에 다니며 많은 여성을 만나 보았는데 양쪽의 문화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구 여성들이 남성 파트너를 선택할 때는 한참 동안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알고 자신을 알린 후에 이루어진다. 남성들은 이러한 자리에서 은근히 시도 읊고 익살도 떨어가며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한다. 춤을 추면서도 어디까지나 대화가 먼저였다. 그리고 마음에 들면 얼마든지 집까지 따라갔다.
그런데 우리나라 댄스홀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소위 바람난 아낙네나 남편들이 상대의 얼굴만 보고 몸을 비벼대다가 따라가고, 그러다 패가망신하는 수가 많았다. 이는 사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댄스홀을 오로지 바람기를 충족시키는 장소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서구식 자유교제는 훈련이 필요하고 인격과 자세가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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