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수로를 조심하세요." 아파트 최상층 실내에 웬 수로(水路)? 제작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펜트하우스로 들어선 2명이 잇따라 수로에 몸을 빠뜨렸다. 물 속에서 빛나던 푸른 조명이 회색 콘크리트 벽을 향해 튀었다. 베일에 가린 수수께끼 투성이 영화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의 촬영 현장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양수리 한국종합촬영소에 자리한 세트장. 100여 명에 달하는 취재진은 100평이 넘는 널찍한 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통유리 바깥으로는 서울 야경을 찍은 사진이 에워싸고 있고, 안으로는 벽 전체를 덮을듯한 거대한 파도 그림이 양 옆에 걸려 있다. 8개의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 사치스런 소품과 가구들이 늘어서 있고 방 한 가운데를 수로가 가른다. 700만원 짜리 자동 유리 장롱, 초대형 벽걸이 TV, 3,000만원 짜리 뱅앤올룹슨 오디오 세트, 고급스런 진열장 안에 수입한 세계 각국 사진기 70여 개…. 그러나 이 호화로움은 조금 별스럽다. 대만 영화 '애정만세'의 텅 빈 고급 아파트가 소통 부재의 사막 같은 도시 타이베이를 말해주었듯, 이 펜트하우스도 영화 속의 기묘한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전한다.
집 주인도 묘하다. 이날 촬영 장면은 종반부인 신 98. 이우진 역의 유지태가 머리를 뒤로 모두 넘기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빳빳하게 풀을 먹인 와이셔츠에 천천히 넥타이를 매고 커프스버튼을 잠그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주거 공간을 "황량하죠"라며 짧게 묘사했다.
누가 이 사람이 인공심장을 달고 15년이나 오대수(최민식)라는 사내를 사설감금방에 가두었다고 믿을 것인가. 더구나 오대수의 침입을 받고도 태연하게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 게 아냐"라고 핀잔을 주며 구두를 신고 있다. 왜 그는 오대수를 가둔 것일까?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다가 15년 간 군만두만 먹으며 영문도 모르게 감금당했던 오대수는 얼빠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복수심으로 가득한 최민식의 검붉게 탄 얼굴은 펜트하우스와 이상한 대비를 이루었다.
2억5,000만원을 들여 25일간 만든 펜트하우스는 이우진의 황량한 내면과 다름없다고 류성희 미술감독은 말했다. "높은 천장과 수직의 기둥, 미니멀한 철제 소품과 호화롭지만 삭막한 수로를 통해 아무도 살지 않을 곳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엄청난 부에 비해 휑뎅그렁한 이우진의 내면을 공간화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화장실도 세면대도 보이지 않고 책도 음반도 별로 없는 생활의 냄새가 거세된 공간. "감금방보다 여기가 더 미칠 것 같은 곳이죠." 사자 갈기 같은 머리를 흔들며 최민식이 박 감독에게 말도 안된다는듯 손사래를 쳤다. "감금방이 더 심하죠! 여기는 10분의 1도 안 돼요."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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