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회에서 야구라는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은 우리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범위하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파업이라도 일으키면 범죄율이 급상승하고 대통령이 중재에 나설 정도다. 그런 판에서 정상급을 달리던 박찬호가 요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지난 6월 옆구리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서 내려온 후 모습을 감췄다.2001년말 박찬호는 오래 몸담았던 LA를 떠나 텍사스로 둥지를 옮겼다. 받은 돈은 5년간 총 7,100만달러. 당시 환율로 따지면 900억원을 넘는 거액이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총액이 240억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선수 전원에게 연봉을 3년치나 주고도 남을 돈이다. 초고액 연봉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박찬호는 이후 신통치 않았다. 지난해 9승을 올리는 데 그쳤고, 올해는 단 1승만을 거둔 후 무대에서 사라졌다. 물론 부상이 가장 큰 이유지만, 텍사스 구단측으로서는 땅을 칠 노릇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이상 돈을 물어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액을 대신 갚아주고 박찬호를 데려갈 구단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거는 건 메이저리그에서 투수가 부상의 깊은 늪에 빠졌다가 회생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점이다. 재활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박찬호 역시 재기가능성은 남아있다. 그러나 박찬호가 부활하더라도 그와 텍사스팀의 앞날에 대한 현지의 전망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기량은 일정 수준 이상일지 몰라도 리더로서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박찬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텍사스의 투수 십여명 중 에이스였다. 프로야구팀의 조직생리도 일반 사회조직과 흡사하다. 투수 에이스쯤 되면 경기도 중요하지만 조직을 추스르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암묵적으로 주문받는다. 쉽게 말하면 선수들에게 밥 사고 술 사고 애환을 함께 하면서 각양각색의 구성원들을 화학적으로 융합해내는 역할이다. 그런 풍토에서 박찬호는 '외통수' '나만 잘 하면 되는 선수'로 통한다. 구성원들을 다독이고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역할과는 아예 담을 쌓았다는 수근거림도 들린다. 개인 성향과 황색인종에 대한 차별,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메이저리그 10년차인 그의 현재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왠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박찬호에게 괜한 감정이 있어서 꺼낸 얘기는 아니다. 우리사회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유감스럽게도 '박찬호식'이라는 생각에서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숱한 실책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여전히 아우름과 추스림의 정치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말의 성찬, 갑론을박, 어수선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촉발되는 외통수식 언행과 거친 입은 지난 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용두사미로 끝나가는 신당 논의, 언론에 또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한 대통령의 말 같은 것이 최근작들이다. 조정과 협의를 통해 만들어지는 그럴듯한 결과물은 찾을 수 없고 곳곳이 어수선할 뿐이다.
그런 조정역을 할만 한 인사도 찾기 어렵다. 야구로 치면 감독이 대신해줄 수 없고 꼭 필요한 에이스의 역할이다. 전 정권에서는 박지원씨가, 그 전에는 김현철씨가 음습한 방식으로나마 그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는 쓴 소리가 나올 정도다. 때론 논쟁과 대결, 외통수적 기질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짧을수록 좋다. 가진 것 없는 작은 땅덩어리라는 명제는 현재와 미래에 모두 유효하기 때문이다. '공만 잘 던지는' 박찬호에서 '공도 잘 던지는' 박찬호로 변모한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
김 동 영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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