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시인통신'은 갔습니다…."주말인 1일 밤 서울 종로구 청진동 '피맛골' 초입에 자리한 카페 '시인통신'에선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을 패러디한 구성진 가락이 울려 퍼졌다. 국악작곡가 변규백(58)씨가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한 자락 뽑아 낸 것. 변씨와 개그맨 전유성, 화가 이목일씨 부부 등 10여명이 이날 시인통신에 모인 것은 20년 단골인 이곳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대책을 마련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청진동 6지구'로 분류된 청진동 166번지 일대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하면서 피맛골의 술집과 음식점을 사랑방 삼아 즐겨 찾았던 문화·예술인들이 피맛골살리기에 나섰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평민들이 종로 큰길로 다니던 양반의 말을 피해(避馬) 다니던 좁은 골목길로 광화문 교보문고부터 종로6가까지 대로변 북쪽건물 뒤편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조선시대 가세가 기운 양반댁 아낙들이 팔뚝만 내밀어 국밥을 팔아 '팔뚝거리'라 불리기도 했을 만큼 값싸고 푸짐한 음식점과 주점이 많아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도 줄을 잇고 있다.
이러한 전통을 잇는 가게들이 들어서다 보니 주머니가 가벼운 문화·예술인은 물론 샐러리맨들이 문학과 예술, 인생을 논하는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번에 재개발 대상이 된 종로 1가의 피맛골 100여m에는 시인통신을 비롯, 실비집, 조방낙지 등 유서 깊은 서민풍 가게들이 과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 도심재개발지구로 선정됐지만 피맛골 보전 문제 등으로 지연돼 왔던 이 일대 재개발 사업이 최근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현대자동차로부터 1,926억원을 신탁 받은 김모씨 등 2명의 사업자가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김씨 등으로부터 사업을 위임 받은 GF산업개발이 2001년 재개발 사업인가를 받은 데 이어 지난달 이곳에 스포츠센터와 식당가, 11∼48평 규모의 오피스텔 600실 등을 갖춘 5층과 20층 건물 1개동씩 2개동(연면적 3,200평)의 '르메이에르 종로타운'을 건설하겠다고 계획을 변경, 건축계획변경안을 종로구청에 제출했기 때문.
특히 7월 말까지 이 일대 세입자들에게 가게를 비우고 나가라는 최후 통보를 해놓은 상태. 이에 대해 세입자와 일부 땅 주인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10년 이상 지켜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듯 떠날 수 없다"며 대책위를 만들었고 30여명의 문인들도 조만간 피맛골 살리기 운동에 나서기로 했다.
소설가 박인식(53)씨는 "얼마 전까지도 시인통신, 열차집, 용인집, 남도식당이 있는 피맛골을 다니지 않으면 문화인 축에도 못 들었다"며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 민주당 김영환 의원 등 정치인을 비롯, 소설가 이외수·마광수, 행위예술가 무세중, 화가 강찬모, 황필호교수, 만화가 한희작, 스포츠투데이 이두엽 전무, 출판기획가 김대웅씨 등 200여명의 내로라 하는 명사들이 모였던 곳인데 재개발 사업은 그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앗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종로구청 관계자는 "피맛골을 최대한 살리는 방안으로 재개발이 추진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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