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속편들은 '속편의 법칙'에 따라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더 화끈한 액션을 보여준다. 장르는 다르지만 윤석호 PD의 계절연작 시리즈 3탄인 KBS2 드라마 '여름향기'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가을동화'와 '겨울연가'의 속편은 아니지만 충실히 '속편의 법칙'을 따른다.일단 전작의 익숙한 부분을 그대로 반복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서로 아는 사이이고, 휴양지의 아름다운 풍광이 화면 가득 펼쳐지고, 무엇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첫사랑'이 주제다.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민우(송승헌)와 그의 첫사랑에게서 심장을 이식 받은 혜원(손예진)이 사랑에 빠진다.
익숙하게 했으면 그 다음은 '속편의 법칙'에 따라 더 '화끈'하게 '첫사랑'을 밀어붙이는 일. '가을동화'의 준서(송승헌)와 은서(송혜교)는 10년 이상 서로를 친남매인줄 알고 지냈고, '겨울연가'의 준상(배용준)과 유진(최지우)은 고교 시절 친구였다. 이들은 서로 첫사랑이기도 하지만 '사람'으로서 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그려졌다.
그러나 '여름향기'에서는 사람이나 세월 같은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민우와 혜원이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첫사랑의 심장' 때문이지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심장의 힘은 이들을 '우연히' 같은 산에서 조난을 당하게 만들고, 또 '우연히' 같은 곳에서 일을 하게 만들며, '알고 보니' 서로 수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혜원과 민우는 그것을 '핑계' 삼아 서로를 향해 직진한다. 산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고, 취향까지 같고, 게다가 둘 다 얼굴도 멋지게 생길 확률 따윈 따지지 말라. 이건 '더 강하고 더 화끈해진' 속편이니까.
윤 PD가 강조하는 건 현실적 개연성이 아니라 더욱 강력해진 비주얼로 첫사랑의 힘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름향기'의 첫사랑은 현실속의 첫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영상으로 만든 '신화'다. 초록색과 분홍색 풀과 꽃이 절묘하게 섞인 동화 같은 느낌의 풀밭이나, 꽃으로 뒤덮인 방안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민우의 모습 등은 윤 PD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준다. 이제 첫사랑은 죽음을 넘어섰고, 영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서며, 캐릭터는 멋진 사람이다 못해 도덕 교과서에서 걸어 나온 듯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배경 좋고 배우 좋다. 이래도 안 봐 줄래? 포장은 예쁘지만 들이대는 방법은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멜로 블록버스터'식 쏟아붓기가 시청자에게 통할지는 의문이다. 더 크고 화려해지는 것이 속편의 강점이라면, 그만큼 식상하고 억지스러울 수 있는 것이 속편의 약점이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면 첫사랑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스토리를 '강요'하는 드라마. 오, 지금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여름향기'는 멜로물이지만, 이 '첫사랑 시리즈'에 지겨울 만큼 익숙해진 시청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매우 극단적 수단을 동원한다. 그리고 속편이 대부분 그렇듯 '여름향기'에서는 첫사랑의 설레임보다 "또 첫사랑이냐"는 식상함이 느껴진다. 정말로, 첫사랑은 죽었다.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씨가 쓰는 TV평을 오늘부터 매주 목요일 연재합니다. 방송 작가이자 음반 기획자인 강씨는 인터넷 홈페이지(www.freechal.com/triplecrown)와 잡지 등 여러 매체에 방송 영화 음악 CF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평론을 실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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