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이걸 까고…. 얘기도 없이 자술서부터 덥석 받아오면 어떻게 되나. 이건 수사 본류가 아니쟎아.""먼저 알아서 진술을 하는데 어떡합니까."
"그러면 뭐하러 결재를 받으러 왔어. 당신이 검사장 해라."
"나중에 다 드러날텐데 검사장님이 책임질 수 있습니까."
검찰이 민주당 당료인 최택곤씨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신광옥 전 법무차관을 소환조사하던 2001년 12월19일. 진승현씨의 정·관계 로비가 문제된 '2차 진승현 게이트'의 수사검사인 홍만표 서울지검 특수1부 부부장이 김대웅 당시 서울지검장의 방에 들어간 직후 김 검사장의 고성이 새나왔다. 홍 검사는 신 전 차관이 진씨 구명로비와 관련, 최씨로부터 1,800만원을 받은 것 외에 건축자재업자 구모씨에게 해양수산부 국장급 인사청탁 명목으로 500만원을 더 받았다는 최씨의 자술서를 갖고 들어간 상황이었다.
홍 검사는 신 전 차관의 혐의에 500만원 부분을 포함시키려 한 반면, 김 검사장은 "진승현 사건과 관련이 없는 별개 사건"이라면서 반대했다. 홍 검사는 완강히 버티다 김 검사장이 "내가 책임지겠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자 그때서야 한발 물러났다. 김 검사장은 500만원이 추가되면 수수액수가 2,000만원을 넘어 영장발부의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반대로 2,000만원 미만이면 기각될 가능성도 있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인 20일 밤 김 검사장은 퇴근길에 기자들이 신 전 차관의 신병처리에 대해 묻자 "차관급 고위공직자라면 (뇌물액이) 3,000만원은 돼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불구속 가능성을 흘렸다. 검찰은 21일 오전 신 전 차관을 일단 귀가시킨 뒤 김 검사장의 지시대로 1,800만원 부분에 대해서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사전영장 청구는 검찰 선배에 대한 예우의 측면도 있었으나 영장기각 가능성도 크게 작용했다.
김대웅 전 검사장의 회고. "신 차관을 구속까지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3,000만원은 돼야지'라고 일부러 흘려봤는데 다음날 여론이 무척 안 좋더라. 그래서 1,800만원만 가지고 영장을 치라고 했다. 1,800만원 정도면 기각될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발부됐다. 영장이 발부된 뒤 홍 검사가 찾아와 '구속됐는데 범죄사실에서 제외시킨 부분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른 인사청탁건을 기소할 때 포함시키라고 했다."
12월30일 신 전 차관을 기소할 때는 최씨가 먼 친척 되는 예금보험공사 간부의 인사청탁 대가로 건넨 300만원과 이 500만원 부분이 추가돼 수수액수는 2,600만원으로 늘어난다. 당시 검찰은 브리핑에서 "부산에 있는 구씨의 소재 파악이 안돼 영장 범죄사실에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김 전 검사장은 신 전 차관을 구속시키지 않기 위해 이처럼 애를 썼다고 설명하지만 신 전 차관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올 2월 항소심에서 최씨가 건넨 2,100만원에 대해선 무죄가 선고됐으나 500만원 부분은 유죄로 인정됐다. 결국 신 전 차관은 사건의 본류인 진승현 관련 부분에서는 무죄가 됐지만 '별건'에 발목이 잡힌 셈이다.
신 전 차관이 자신의 구속 배경에 음모가 있고 김 전 검사장도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수사의 단초가 된 중앙일보 2001년 12월11일자 '1억원 수뢰설' 보도가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흘러나갔고, 이것이 사실로 드러나지 않자 다른 혐의로 옭아맨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신 전 차관이 그리는 구도엔 신승남 검찰총장과 김 검사장이 생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삼았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신 전 총장과 신 전 차관의 갈등 부분은 5월14일자 본란 참조)
신 전 차관을 잘 아는 한 검사의 설명. "신 차관에 대한 영장을 청구한 다음날 김은성 국정원 2차장이 소환됐는데 김 차장이 '진승현 게이트'의 배후이고, 김 검사장과 가까운 사이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김 차장이 1년 전 중수부장이었던 김 검사장에게 진승현의 구명을 시도한 일도 검찰 내에서는 파다했다. 일부 검사 사이에서는 김 검사장이 자신에 대한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신 전 차관을 이용했다는 시각이 있었다."
신 전 차관의 회고. "영장이 집행되기 직전 김 검사장이 찾아와 '신 총장이 고교 선후배간이니 손을 떼라고 해 힘을 못쓴다'고 변명하더라. 내가 김 검사장한테 기대라도 하고 있었으면 그 자리에서 뺨이라도 올려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에 '고생했네'라고만 했다." 신 전 차관은 김 검사장이 자신을 구속하면서 당시의 '신(愼)-신(申) 갈등설'을 이용, 신 총장의 이름을 판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신 전 차관은 "서울지검장이 검찰청법에 규정된 검사지휘권을 총장이 달라고 해 그냥 반납했다는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말했다.
이에 대한 김 전 검사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소할 때 500만원 부분을 추가하지 않았다면 전부 무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신 차관이 받은 돈은 훨씬 더 많다. 300만∼500만원씩 받은 돈이 나왔지만 대가성 입증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아 액수가 많이 준 것이다."
당시 수사 내용을 잘 알고 있는 A검사의 설명도 비슷하다. "당시 최택곤씨는 '신 차관에게 200만∼300만원씩 1억원 가량을 줬다'고 진술했으나 검찰이 '40∼50차례나 되는 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느냐. 정확히 진승현 구명과 관련해 준 돈만 진술하라'고 한 것 같더라. 내가 알기론 수사를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최씨가 진승현씨 등에게서 돈을 받아 쓴 사용처나 배달사고 여부에 대해선 손을 안댔다. 최씨 가족의 통장엔 수억원이 있었지만 최씨측의 해명만 듣고 사용처를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광주일고 동문인 김 전 검사장과 신 전 차관은 이 일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다. 같은 전남 출신인 신 전 차관과 신승남 전 총장도 마찬가지다. 신 전 총장은 신 전 차관을 겨냥, "요즘 말을 막하고 돌아다니는 모양인데 가만 안 있으려고 한다"며 "(수사할 때) 많이 봐줬는데 가만 있어야지 왜 떠들고 다니느냐"고 말했다.
'이용호 게이트'가 DJ정부 '호남검찰'의 몰락을 촉발시켰다면, '진승현 게이트'는 이렇게 해서 수면 아래 있던 '호남검찰' 내부의 갈등과 암투를 표면화해 그 몰락을 가속화했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 신광옥과 김대웅
신광옥 전 법무차관과 김대웅 전 서울지검장. 두 사람은 '진승현 게이트'로 신 전 차관이 구속된 이후 연락 한번 안했지만, 그전까지는 '형님, 아우' 이상의 사이였다. 신 전 차관은 김 전 검사장의 광주일고 2년 선배이면서 사법시험은 12회로, 13회 출신인 김 전 검사장보다 한 기수 빠르다.
절에서 함께 고시공부를 했고, 두 사람은 상대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30여년간 무척 가깝게 지냈다. 신 전 차관이 검사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 '가짜 신광옥 검사'가 사기를 치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김 전 검사장이 가짜를 다방으로 유인, 진짜 신 검사와 함께 붙잡은 일화도 있다.
또 신 전 차관이 1982년 초대 해남지청장을 맡았고 다음해 바통을 김 전 검사장이 넘겨받았다. 신 전 차관은 대검 중수부장이던 1999년 12월 옷로비 특검이 끝난 뒤 김태정 전 법무장관과 박주선 전 법무비서관을 구속했다. 당시 김 전 검사장은 대검 강력부장으로서 수시로 사건처리 방향 등을 조언했다. 공교롭게 김 전 장관과 박 전 비서관은 모두 광주고 출신이었다. 게다가 신 전 차관은 박 전 비서관의 구속 직후 차관급으로 격상된 민정수석으로 영전했고, 김 전 검사장은 중수부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검찰 일각에서는 "광주일고가 광주고를 쳤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사정업무를 총괄하는 민정수석과 사정수사 사령탑인 대검 중수부장에 고교 선후배가 앉아 '청와대와 검찰의 핫라인'을 구축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2001년 1월 신한국당의 안기부 예산 총선 전용사건 수사 때 자금을 유용한 200명의 이름이 중앙일보에 실린 것을 놓고 두 사람은 아직까지 상대방을 유출자로 의심한다.
김 전 검사장의 설명. "당시 명단은 나와 박순용 총장, 신승남 차장 등 셋만 갖고 있었다. 신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고 해서 줬더니 바로 다음날 아침 중앙일보에 실렸다. 신 수석은 그날 중앙일보 고위 인사를 만났다."
신 전 차관의 반박. "나를 의심하는데 나는 알지만 말 못한다. 수사기밀누설로 문제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않느냐. 당시 그 기사로 특종상을 탄 기자는 민주당 출입기자였다. 권력실세와 가까운 사람들이 주지 않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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