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김봉준(49)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그림 한 점을 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1980년대 문화현장에는 어김없이 그의 목판화가 포스터나 걸개그림의 형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홍익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대학가 탈춤운동의 초창기세대였고, 1978년에는 마당극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를 쓴 작가이도 했으며 80년에 광주민주화항쟁을 알리기 위해 서울지역에 최초로 뿌려진 유인물의 저자였으며 82년 기독교 농민회 시절에는 만화책 '농싸꾼 타령'을 만들었다. 82년에 서울대 정문에 걸린 최초의 걸개그림 '아아, 김상진 열사'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노동현장과 시위현장, 풍물굿을 그려낸 목판화들은 90년대초까지 갖가지 대안운동 현장에서 쓰였다. 민중문화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는 93년 생활과 하나되는 예술을 실현한다며 강원도 원주시 문막의 산골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회주의권 몰락에 따른 시대의 변화에 몸살을 앓으며 그는 진짜로 병(임파선암)을 얻었다. 2000년, 병이 낫자 그는 마을주민들과 산골마을축제를 열었다. 그러나 축제는 이태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그를 만나러 간 것은 그가 시골에 맞는 생태학적인 살림집을 직접 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는데 막상 가보니 집은 엉설궂었다. 그는 고민이 깊어보였다. 왜 한국사회는 답보상태인지, 그의 고뇌는 한국인이 함께 고민해볼 문제였다.―여름이면 열던 진밭축제를 올해도 열지 않는가.
"반대하는 소리도 있어서 모두가 동의하기 전까지는 열지 않겠다고 하고 기다리고 있다. '숲과 마을 미술축전'이라고 이름붙인 진밭축제는 2000년과 2001년 딱 두해동안 7월말에서 보름간 열렸다. 지자체에서 예산을 쏟아부어 열리는 관제 축제가 아니라 마을 주민들끼리 마을주민들만의 힘으로 시작된 축제라서 주위 기대가 컸다. 문막에 사는 미술가들 스무명이 시작 기금을 모은 뒤 미술가들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농민들은 먹을거리를 내놓았다. 주민들이 민박과 식당을 운영했으며 미술가들은 미술작품을 판매하면서 판화를 직접 찍어보고 도자기도 만들어보게 했다. 잘되면 미술문화시장을 매개로 우리 동네(취병 1,2리)를 관광문화예술로 먹고사는 생태공동체로 꾸며보고 싶었다. 첫 해에 1,000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서 2,000만원 정도 수익을 올렸다. 두번째 해에는 마침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지역문화의 해'와 맞물리면서 지자체에서 1,000만원을 후원받기도 했다. 그러나 문막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이 잔돈 버는 재미에 축제가 시들해졌다. 또 이 지역의 주요 업종이 축산인데 젖소를 키우면 한달 수입이 500만원, 1,000만원이다. 그러니 성실하게 물건 팔아 조그맣게 하는 것이 성에 안 찼을 것이다. 지금도 노인이나 아주머니들은 계속 하자고 한다. 축제가 열리면 아줌마들은 식당을 운영하고, 노인들은 쇠를 치거나 이엉을 엮는다. 쓸모 없이 여겨지던 노동력이 쓸모를 갖게 되는 것이 바로 마을축제가 가진 공공성이다. 그런데 지금 시골에서는 이런 작은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는 상업축제를 만들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축제로 인해 마을이 공개되면서 24시간 청정마을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던 모양이다."
―왜 모든 사람이 찬성해야만 하는가.
"모두가 찬성하지 않는 상태에서 여는 마을축제는 관제축제나 다를 바가 없다. 축제가 수익사업이 되면서 지방자체단체마다 축제가 많이 열리고 있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주민들이 즐기는 축제가 아니다. 지방에서 문화축제가 열리면 시장부터 학교 교장까지 유지들이 공치사 하는 것으로 시간의 반은 잡아먹는다. 누가 축제의 주인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축제를 오래 하다보면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발성도 사라지고, 축제의 기본인 인심과 신명도 죽어버린다. 그런 축제는 축제가 아니다."
―인심과 신명이라니?
"손님에게 따뜻하게 대접하는 것이 인심이고, 사람들이 즐거워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신명이다. 진밭축제가 인기를 끈 것은 바로 인심과 신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줌마들이 음식을 내놓아도 정있게 듬뿍듬뿍 주려고 했고, 민박손님도 어른 6,000원 아이 3,000원 이상을 안 받았다. 그걸 겪어본 사람들은 그 다음해에도 또 오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좁은 마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오히려 걱정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축제에는 신명과 인심이 없는 것이 너무 많다. 물론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군사독재가 비롯된 30년 40년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민속문화경연대회라고 하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즐기던 전통문화를 운동장에 모아놓고 남한테 보여주는 전시용으로 만들었다. 그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사람들이 축제의 자발성을 잃어버렸다. 축제뿐이 아니라 모든 문화에서 신명이 사라졌다. 쉽게 말해서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일제때부터 기층민을 억눌러왔으니 100년은 된 문제이다. 민초들의 자발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형식적으로 이거 하라 저거하라 하는데 끌려다니다보니 서민으로서의 자기 존재가치나 자부심이 없어졌다. 지금 공부잘하는 사람, 지식인만이 인품이 있다고 생각하지 일하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한지 인정을 하지 않는다. 100년동안 생겨난 문제이니 100년은 흘러야 풀릴 것 같다."
―농민과 노동자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문제라는 소리도 있는데.
"좀 다른 문제이다. 품앗이를 하다보면 저사람 참 인격자다 싶은 사람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 동네에 김춘선씨라는 70대 노인이 계시다. 그 분은 절기를 기막히게 잘 맞춘다. 가령 '밤나무 잎사귀가 나비 날개만큼 피어날 때쯤 목화씨를 뿌린다'고 한다. 그런 게 정확하게 맞다. 자기가 이웃하고 있는 동물과 식물과 함께 지내는 것을 아는 분이다. 오늘날 생태와 환경이 소중하다면 이런 경험자들의 이야기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그런데 이 분이 일제때 초등학교를 중퇴하셨는데 학력이 없으니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에 힘이 없다. (김봉준씨는 진밭축제를 열면서 김춘선씨를 진밭마을 문화진흥회 회장으로 모셨다) 목소리가 큰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발언에 힘을 갖는다. 이게 사소한 문제 같지만 결국에는 이런 것 때문에 지역주민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만 번지르르하게 농민을 위한다는 지식인이 지도자가 되고 결국 우리 문화가 구심력은 없고 원심력만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이 다 찬성해야만 마을축제를 연다고 하는 것인가.
"5년 10년이 걸리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무늬만 민주주의인 사회에 살고 있다. 지금 농촌에서는 돈 있고 세도부리는 사람, 목소리 큰 사람만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술먹고 투덜대는 소리나 한다. 이걸 깨고 나갈수 있는 실천과제가 마을살리기 축제인데 그게 현실적으로 힘들다. '개울이 지저분한데 손님 오니 치워봅시다' '쓰지않는 비닐하우스 방치되고 있는데 이번에 치워봅시다' 이런 게 되어야 하는데 그런 걸 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제제일주의가 아주 뼛속까지 배어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월드컵을 거치면서 우리 모두가 축제와 신명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서울시청앞 광장에 몇 사람이 모였느냐가 아니라 동네마당에서 모여 노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광장문화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광장하면 동원하는 데모꾼이나 투쟁만 생각나고 뭔가를 서로 뺏으려고 하는 곳이 광장이다. 월드컵에서 광장의 놀이문화가 시작됐다지만 진짜 광장의 의미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실은 문화의 자발성을 거대한 광장에서만 찾는다고 하기 때문에 그 이후를 못 찾는다. 월드컵 열기 뜨거웠고, 그 신명을 인정한다. 그런데 크게 놀아야 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월드컵을 생각하면서 '언제 한번 또 놀아보나' 그런 생각만 한다. 광장에서 놀 줄 알면 아파트 마당이나 동사무소에서도 놀아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 또 서울시청앞 광장에서처럼 크게 놀면 제각각 노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까 월드컵때 축제도 거대한 군중집회 같은 느낌이 있지 않았는가."
―집짓고 문화운동하고 언제 예술을 할 것인가.
"이제부터는 진짜 미술작업을 하려고 한다. 테라코타도 하고 목판화도 하고, 붓그림도 그리고 다 하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청산주의가 문제이다. 80년대 들어 전통문화를 살리려는 거대한 흐름이 시작됐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세가 되더니 전통은 쑥 들어가버렸다. 만화가 새로운 문화의 중심이면 우리 전통에서는 만화를 어떻게 그렸나를 공부해야 세계속에서 우리만의 생산물을 내놓을 수 있다. 그냥 공부가 아니라 전통문화를 몸으로 체험하는 작업이 곳곳에서 일상으로 일어나야 한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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