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 인민군은 웬일인지 3일 동안 진격을 멈추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남으로 쫓겨간 우리 군에게는 전열을 가다듬을 귀중한 찬스였다. 25일 아침 전쟁 발발 보고를 받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그날 오후 3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이사회를 소집해 북한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케 했다. 마침 거부권을 가진 소련 대표가 장기결석 중이어서 27일과 30일 회의에서도 한국군 지원과 유엔군 참전결정을 미국 뜻대로 가결할 수 있었다. 북한군의 진격중단은 이렇게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 조치에 따라 도쿄(東京)에 있던 맥아더 장군이 29일 한국에 날아와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주일미군의 투입을 결정했다. 주일 미 24사단 21연대 1대대 병력이 사흘만인 7월1일 부산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미군의 참전이 본격화했다. 만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속도로 쉬지않고 밀고 내려왔으면 남한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것이라는 게 당시 한국군 수뇌부의 공통된 견해였다. 정일권 장군은 생전에 "그렇지 않았다면 미군 참전이 때를 놓쳤을 것이고, 따라서 전황을 역전시킨 인천 상륙작전도 어려워졌을지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 정전협정 50주년을 기해 미국에서 한국전쟁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UPI 통신에 따르면 트루먼과 맥아더 등 큰 실책을 저지른 미국 수뇌부 사람들이 전쟁영웅으로 평가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이다. 트루먼은 한국전쟁을 단순한 치안활동 쯤으로 여겼고, 맥아더는 휘하병력 훈련을 게을리해 초기대응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말 그대로 트루먼이 한국전쟁을 치안상황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서둘러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까지 소집할 이유가 있었을까.
■ 맥아더에 관한 부분은 더욱 그렇다. 미군의 초기대응이 유효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인천 상륙작전을 기획하지 않았다면 군 수뇌부와 정부가 제주도나 괌, 또는 하와이로 쫓겨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미 국방부와 합참은 조수와 지형 등을 고려할 때 인천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상륙작전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병사들을 두고만 볼 것이냐"면서 작전을 감행해 한국을 구해냈다. 휴전협정 50돌을 맞아 영웅을 폄하하는 기사를 읽으며 영웅들의 재평가가 이렇게 덧없을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답답하였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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