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싱글즈'(사진)를 엄정화 중심으로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면 21세기 한국영화에 도도히 흐르는 '동거 영화'의 계보도가 감자 줄기 엮어져 나오듯 주루룩 펼쳐진다. 기억하는가? 세기말 한국영화의 애정 전선이 얼마나 불온했던가를. 애 딸린 아줌마가 여동생의 애인을 꼬시질 않나('정사'), 상복 입은 유부녀가 그 새를 못 참고 유부남과 격정에 휩싸이질 않나('실락원'), 대학 강사라는 녀석은 간통이라는 구질구질한 죄목에 걸려 개망신을 당하고('세기말'), 여학생 하나 꼬시더니 지리멸렬한 나락으로 빠지질 않나('강원도의 힘'), 하여튼 가관이었다.이 모든 영화는 섹스라는 '부적절한 행위'에 원죄 의식을 부여한다. 그래, 모든 것이 허리하학적 욕망 때문이었어, 결혼이라는 제도는 정말 똥 싼 바지처럼 걸리적거리기만 하는군….
불륜이 섹스 때문에 질척거린다면 동거는 얘기가 좀 다르다. 한국영화의 동거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은 섹스 때문에 동거하거나 아니면 섹스가 없기 때문에 동거한다.
먼저 섹스 때문에 동거하는 사람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그들이야말로 우연히 속 궁합 한 번 맞춰 보더니 "어, 이거 장난 아닌걸?" 하며 바로 동거에 돌입한 커플이다. 그들은 할 건 다 해 보고, 이건 사랑일까 육욕일까 고민도 하다가 결국은 헤어진다. 다시 합치자는 남자의 제안? 거부하는 여자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겠지. '그럴 정성 있으면 딴 놈 찾겠다.'
여자에게도 첩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럽게 권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그들도 마찬가지. 첫 데이트에서 여관으로 직행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맺어지지 못했을 커플이며, 여자가 남자에게 옥탑방까지 얻어주며 '남 그스지 얼어두고' 즐길 이유가 없었을 거다. '거짓말'은? 사실 그들만큼 강도 높은 동거를 하는 커플은 한국영화에서 전무후무할 거다.
이들의 반대편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우연한 동거자들이나 '와니와 준하'의 순정만화 풍 커플도 있다. 이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이유는? 칭얼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라고도 하지 않고 줄 생각도 없다.
'싱글즈'는 결국 섹스를 하고 만다. 룸메이트라는 이름 밑에 감춰진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게 마련이었을까? 그런데 섹스는 임신과 연결되고, 싱글 마더를 결심한 여자는 남자에게 이 사실을 안 알리겠단다. 그리고 동거는 끝이다. 엄정화의 관점에서 본 '싱글즈'는 어쩌면 비극이다. 좀 더 '쿨'할 수 없었을까? 같이 살면서도 싱글처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앙금 남는 이별은 너무 텁텁하다.
/김형석·비디오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