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27일 필리핀 위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19시간 만에 평화적으로 해결됐다.296명의 반란군은 이날 새벽 마닐라 금융중심가의 글로리에타 쇼핑센터를 점거한 채 진압군과 대치했으나 오후 늦게 정부측과의 협상 끝에 부대로 복귀하기로 합의했다.
점거·대치
이번 사건은 군부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인지한 정부측이 26일 주동세력에 대한 검거령을 내린 지 수 시간 만에 발생했다. 소장파 장교와 이들이 지휘하는 병력 296명은 자동화기와 폭탄으로 중무장한 채 27일 새벽 3시(한국시각 새벽 4시)께 대형 쇼핑몰과 고급 아파트가 입주해 있는 금융 중심가의 '글로리에타 콤플렉스'에 진입했다. 이들은 건물 주변에 부비트랩과 폭발물을 설치하고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한 채 정부군과 대치에 들어갔다.
이들은 루스 피어스 필리핀 주재 호주 대사 등 외국인들을 포함한 300여명의 민간인들을 이날 오전 건물 밖으로 내보냈다. 풀려난 사람들은 "반란군이 매우 친절했으며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위관급 장교들은 1995년부터 97년 사이 필리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엘리트 군인들로 알려졌다.
정권 퇴진 요구
반란군들은 성명을 통해 아로요 대통령과 앙겔로 레이스 국방장관의 퇴진을 요구했다. 이들은 아로요 정부가 이슬람 반군에게 무기와 탄약을 몰래 팔아 폭탄테러를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부패, 군인연금 관리 소홀에 대한 불만도 제기했다.
반란군 대표인 안토니오 트리야네스 해군 대위는 당초 기자회견에서 "부패 정권과의 협상은 없으며 정부가 퇴진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오후 들어 자세를 완화해 "우리는 권력이 아니라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거사했다"고 강조했다.
정부 대응과 협상 과정
아로요 대통령은 이들을 쿠데타 기도 세력으로 지목하고 신속하게 강경 대응에 나섰다. 그는 계엄령 바로 아래 단계인 '반란 사태'를 선포하고 군과 경찰에 무력진압을 명령했다. 이어 이날 오후 5시(한국시각 오후 6시)까지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반란군에 보냈다.
그러나 반란군측이 협상을 요구해오고,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권과 시민들의 우려가 높아지자 최후통첩 시간을 두 차례 연장하면서 협상에 나섰다.
반란군들은 협상 초반 반란군에 대한 군법회의 회부 면제와 함께 국방장관, 경찰총장, 군 정보총수인 빅토르 코푸스 준장의 해임을 요구했으나 이후 입장을 크게 완화했다. 구체적인 협상 타결 내용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쿠데타 종료 선언
이날 밤 10시께 아로요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소를 지으며 "위기는 끝났다"며 협상이 타결됐음을 선언했다. 그는 장교 70명을 포함한 반란군 296명이 점거를 풀고 병영으로 복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반란군에 대한 처벌과 관련, "반란군은 특별대우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특별대우를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란군들이 상당히 이상주의적이었다"고 말했으나 "반란군 및 이에 연루된 민간인들도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사태종료 선언과 함께 반란군들은 글로리에타 콤플렉스 주변에 설치했던 부비트랩을 해체하고 부대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여파
이번 사건은 필리핀의 고질적인 정치불안과 군부의 정치개입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이번 사건으로 아로요 정부가 받을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부에서는 평화적 해결에 따라 여론 지지도가 올라갈 것으로 예측했으나, 정부의 약체를 재확인함으로써 정권약화가 가속화할 것이란 분석도 있다.
배후세력에 대해서는 2001년 군부 주도의 민중봉기로 쫓겨난 뒤 현재 부정 축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셉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지목되고 있다. 그레고리오 호나산 상원의원도 배후로 거론되고 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외신=종합
● 필리핀 쿠데타는
필리핀은 1980년대에만 7차례의 유혈 쿠데타를 겪었지만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1986년 무혈혁명으로 불리는 민중혁명이 발생하고 당시 군부가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1989년에는 이번 사태와 비슷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반란군은 27일 군인들이 점거한 복합 쇼핑센터의 바로 옆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수일 동안 점거, 임시 본부로 사용하며 저항하다 결국 항복했다. 현재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2001년1월 군부 주도의 민중봉기로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쫓겨난 뒤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에 올랐다. 아로요 대통령은 내년 5월로 예정된 대선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그가 마음을 바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진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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