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월28일. 외환위기로 단 한푼의 외화가 아쉬웠던 대한민국에 모처럼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독일의 대형은행인 코메르츠방크가 외환은행에 3,500억원(당시 환율로 2억5,000만달러)을 투자한다는 내용의 의향서(MOU)에 서명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증시에서 주당 2,200원에 불과한 외환은행 주식을 5,000원에 매입키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불과 6개월 전 미국과 일본계 금융기관의 자금 인출로 부도 직전까지 몰렸던 한국인들에게 코메르츠방크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5년이 지난 2003년. 한국은 외환위기에서 벗어났지만, 한국을 도왔던 코메르츠방크는 경영난을 겪고 있다. 2002년 초 19.07유로였던 주가가 최근에는 13유로대로 떨어졌고, 세계적 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A1→A2)와 S& P(A→A-)도 잇따라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다.98년 코메르츠방크가 위험을 감수하며 한국에 1조원 가까운 돈을 투자한 이유는 독일만의 독특한 금융관행 때문이다. 부실 징후가 나타나면 무자비하게 자금을 회수하는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독일 은행들은 신뢰관계가 쌓인 거래처에 대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경향이 많다. 코메르츠방크 역시 외환위기가 터지기 10여년 전부터 외환은행과 합작으로 한외종금을 설립해 운영할 정도로 돈독한 유대를 맺어왔다.
거래 기업과의 유대를 강조하는 독일식 금융관행은 은행과 기업이 상호 지분출자와 임원파견 형식을 통해 복잡하게 얽히도록 만들었다. 일례로 독일의 중공업분야 대기업인 만(MAN)의 최대주주는 지분의 14%와 7%를 보유한 알리안츠와 코메르츠방크 컨소시엄이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독일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세계 금융시장이 통합돼 독일 자본이 미국이나 영국자본과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 1990년대 후반부터는 오히려 경쟁력 약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독일 경제가 본격 침체에 빠져든 2001년 이후 독일 은행들은 과거의 금융관행 때문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뚜렷한 부실 징후에도 불구, 자금 회수에 나서지 않았다가 2001년 3만2,000개, 2002년 4만여개 등 독일 기업의 줄도산이 잇따르면서 부실여신이 급증하고 있다. 2001년에 발생한 무더기 도산으로 독일 금융기관이 부실 여신으로 쌓아 놓은 충당금은 20억유로에 달한다.
독일 금융권의 구조적 문제가 말해 주듯이 독일은 산업구조 측면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여전히 막강한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2002년 무역수지 흑자가 1,191억 달러에 달하지만, 금융, 유통, 정보기술(IT) 등 서비스 분야에서 미국과 영국에 크게 뒤져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02년 현재 전통 제조업이 독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8.1%로 영국(22.9%), 미국(21.3%)을 크게 앞지른다. 반면 마케팅 집약산업의 비율은 16.2%로 영국(25.5%), 미국(23.2%)에 뒤진다. 쉽게 말해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업 비중이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높은 반면 부가가치와 고용창출 효과가 큰 기술집약산업이나 서비스업 비중은 낮다. 김득갑 수석연구원은 "미국과 영국이 1980∼90년대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한 반면 독일은 구조조정이 미흡했으며, 그때의 격차가 독일과 미국·영국의 성장률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등 현지에서 만난 독일인들도 서비스 분야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독일의 한 기업가는 "한국과 독일의 유통시장이 개방된다면 독일 시장은 1년안에 한국에 점령될 것"이라며 자신의 친구 A씨가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구 동독지역의 대도시에서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한국을 방문한 뒤 큰 감동을 받았다. 손님에게 인사도 하지않고 무뚝뚝한 독일 종업원과 달리, 허리를 90도로 굽혀 절하고 미소가 가시지 않는 한국 종업원들은 경이의 대상이었다.
귀국한 A씨가 한국식 방법을 독일 종업원들에게 교육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A씨의 시도는 일주일도 안돼 무산됐다. 노조 대표가 찾아와 "직원들에 대한 모욕적 행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당장 고발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다. 96년까지 백화점이나 슈퍼 마켓의 평일 영업시간을 오후 6시30분으로 제한했던 독일에서 A씨의 행동은 명백한 노동착취 행위이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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