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브로드밴드(인터넷)를 신청하는 겁니다." 지난 5일 영국 런던을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루프트한자 LH4649편' 기내에서 만난 중국 대학생 로이 첸씨가 한 말이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독일에서는 인터넷을 신청한 뒤 실제로 설치하는데 최소 3주일이 걸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통신회사들의 치열한 경쟁으로 신청하면 1시간도 안돼 인터넷이 가설되는 한국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지만 이 중국 학생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다. 독일에서 3년째 근무하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KOTRA 사무소 양은영 과장은 "독일에서 전화나 인터넷을 가설하려면 신청한 뒤 3∼4주일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라고 말했다.독일 통신회사의 서비스가 이처럼 늦은 까닭은 통신 인프라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건비가 높아 통신회사마다 신규 고용을 회피하는 바람에 통신을 설치해 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2000년 현재 독일 노동자의 시간당 노동임금은 25.81유로로 세계 최고이다. 이웃 프랑스와 영국은 각각 18.26유로와 18.8유로에 불과하며, 미국도 독일보다 3유로나 낮은 22.81유로이다.
독일은 직장을 가진 노동자는 물론이고, 실업자에게도 천국이다. 취업 노동자와 실업자에 대한 법적 보장장치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우선 취업한 노동자. 독일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임금을 받는 반면 연간 30일씩 유급 휴가를 즐기고 있다.
또 고용이 완벽하게 보장돼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절대로 해고되지 않는다. 독일에는 '해고금지법'이 있다. 이 법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부당한 해고는 불법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부당한 해고가 아니라는 것의 입증 책임이 사용자에게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일 사용자가 특정 노동자를 해고하고 싶다면 3개월 전부터 준비해야 한다. 최소 3개월 동안 노동자가 실수할 때마다 매번 경위서를 받아 챙겨둬야지 만일에 벌어질 해고 관련 소송에서 이길 수 있다. 물론 이같은 방법을 통해 가까스로 노동자를 해고한다고 하더라도 사용자는 1년치 월급을 퇴직금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처럼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한데도 독일에 '일하고 싶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실업자가 500만명에 육박하는 이유는 뭘까. 먼저 인건비가 워낙 비싸고, 해고가 힘드니까 기업들이 애당초 고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라이프찌히 거리의 구직사무소에서 만난 한 독일 실업자는 "구직사무소에서 주선하는 일 대부분이 3∼4일 가량 일할 파트타이머"라고 말했다.
독일 실업자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실업자라는 점도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53세 이상 노동자가 해고를 당하면 32개월간 현직 임금의 70% 가량을 실업수당으로 받는다. 32개월이 지나면 실업수당 대신 실업보조금 형식으로 임금의 57% 가량을 계속해서 받게 된다. 해직 후 12개월이 지나면 수당이 끊기고, 수당을 받으려면 2주일에 한 번씩 고용안전센터에 가서 구직활동을 증명해야 하는 한국과는 큰 차이다. 직장을 잃더라도 경제적 궁핍함을 느끼지 못하도록 배려해주는 독일의 복지시스템이 실업자를 길러내고 있는 셈이다.
독일 노동자가 혜택을 누리는 만큼 기업 부담은 가중되고, 독일의 경쟁력은 하락하고 있다. 미국의 격주간 경제지 포브스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주요 17개국의 노동시장 자유도를 평가한 결과 독일이 30.49로 17위인 이탈리아에 이어 16위를 기록했다. 반면 미국은 4.55로 노동시장 유연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평가됐다.
고임금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독일 업체도 잇따르고 있다. 프라운호퍼연구소에 따르면 2001년 기준으로 종업원 500명 이상 기업의 85%가 생산기지 전부 또는 일부를 해외로 이전한 상태이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기업현장 도처에서 확인된다. 프랑프푸르트 인근 소도시인 켈크하임에서 연간 매출액 3억유로 규모의 중견 절삭기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기도 케르버 사장은 "독일 경제 침체의 이유는 노동자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독일 경제는 불명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가장 짧은 노동시간과 가장 긴 유급 휴가"라고 말했다. 케르버 사장의 지적대로 독일 노동자들의 주당 근로시간은 35시간으로 세계에서 가장 짧고, 연간 유급휴가는 근무일 기준으로 30일이다. 주5일 근무제인 것을 감안하면 6주일을 연달아 쉴 수 있는 셈이다.
케르버 사장은 "1998년 한국 대구에 부품 공장을 설립했는데, 지난해부터는 독일의 높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대부분의 주력 제품을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에 비하면 한국 노동자들은 최고"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프랑크푸르트=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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