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27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50주년을 맞아 이곳에서는 21개국의 참전용사 1,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는 이르면 2004년말부터 한국군이 이곳의 경계를 전담하기로 결정된 상황에서 열리는 것이어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 바야흐로 역사적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1953년 7월27일, 3년의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에 따라 폭 4㎞의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됐다. 판문점은 본래 정전협정 당사자인 유엔군과 북한군이 공유하는 곳이다. 직경 800m밖에 안 되는 이곳의 중앙, 즉 군사정전위원회(MAC) 본회의장 테이블 한가운데를 지나는 전화선이 민족을 50년간 갈라놓은 군사분계선(MDL)이다.
판문점은 이후 뼈아픈 '민족 대결의 장'이 된다. 76년 8월18일 도끼만행사건 당시 유엔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바로 앞에 있는 4초소의 관측을 위해 미루나무의 가지를 치려 한다. 그러자 무장한 북한군이 몰려들어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하고 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판문점은 85년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교류가 시작되며 '화해의 장'으로 변모했다. 또 89년 8월 당시 대학생이었던 임수경씨와 문규현 신부가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과한 사건도 나름대로 비공식적 화해무드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에는 한발 나아가 '교류의 장'으로 애용됐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장병의 유해가 이곳으로 송환되었다. 98년에는 당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 1,000마리를 트럭 50여대에 나눠 싣고 북한으로 들어간 일 역시 전쟁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2001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로 판문점은 뜨거운 동포애의 시발점으로 한발짝 다가섰다. 전쟁의 상흔을 되새기는 안보관광객에서부터 영화의 흔적을 음미하려는 젊은이들까지 보태져 연 10만명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판문점을 '잠시 다녀간' 사람들에게만 해당될 뿐 경계근무, 비무장지대 수색·정찰, 훈련으로 판문점의 24시간은 여전히 긴장상태다. 1년 남짓한 시간이 흘러 남북한만 남게 될 판문점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 아직은 미지수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