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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15> 서울신문 필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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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로맨스의 화가 김흥수 <15> 서울신문 필화사건

입력
2003.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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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프랑스 유학을 앞두고 뜻하지 않게 나는 사상문제로 여권을 압수당하고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게 됐다. 소위 '서울신문' 필화 사건이다.내가 이화여고와 서울예고 미술과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강사로 나갈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미술실에서 나와 소공동 반도호텔 주변을 지나가게 됐는데 그 일대가 시끌시끌했다. 반도호텔 주변은 한국 전쟁 때 폐허가 됐지만 이 호텔만은 멀쩡해 환도 후 대통령과 유엔사령관이 이곳에 임시로 머물기 위해 내부수리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호텔에서 벽화를 공모한다는 소문을 들은지라 안으로 들어가 물어보니 3층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다. 벽화 제작비도 적지않을 테니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사무실에 들어가 미국인 책임자에게 응모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한 달간 여유를 줄 테니 그려오라고 했다. 일단 한달 내에 대략적 구상을 담은 그림을 제출하면 그걸 보고 평가해서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벌써 사무실 안에는 내로라 하는 작가들이 그린 10호 크기의 응모작들이 늘어서 있었다.

화실로 돌아온 나는 즉시 봄에 산나물을 캐는 한가로운 장면을 담은 '한국의 봄'을 10호 크기로 그려서 한달 만에 갖고 갔다. 그는 내 그림을 보더니 "바로 이런 작품을 찾고 있었다"며 "다른 그림은 인물을 모두 서양 여자처럼 그려놓았지만 이 그림은 정말 한국 여자"라고 흡족해 했다. 수십대 일의 경쟁을 뚫고 내 응모작이 선택된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이화여고 미술실에서 6개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렸다. 벽화가 완성될 즈음 여권이 나와 이를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서울신문 사회부장인 오소백씨를 만났다. 그는 유명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자신은 글을 쓰는 시리즈를 계획하고 있으니 바쁘지 않으면 같이 해보자고 했다. 이화여고 근처에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무너지고 한 쪽에 탑만 덩그러니 남은 러시아 영사관이 있었다. 그 옆 빈터에 이북에서 내려온 피란민 한 사람이 깨진 벽돌을 모아 땅굴집을 짓고, 영사관 게양대에는 태극기를 꽂아 놓고 빵 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러니컬한 장면을 그려주었고 오소백씨는 '제정 러시아의 건축 폐허에 시음(詩吟)이 흐르고 있다'는 글을 써서 신문에 실었다.

그때 서울신문은 여당지이면서도 자유당 정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신문사 간부진을 교체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적성국가의 영사관에 대해 '시음이 흐른다'는 찬사를 보낸 것으로 보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몰고 갔다. 나도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나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원화를 보여주며 설명을 했다. "원화에 분명히 태극기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문에 인쇄되면서 잘 보이지 않게 된 겁니다. 나는 공산당이 머물던 건물 터에 피란 온 사람이 사는 아이러니를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

하지만 한 건 잡았다고 생각한 당국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일로 신문사는 사장과 편집국장 등을 포함,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오씨와 나도 구류될 뻔했으나 기자협회가 적극 나서서 구명운동을 벌인 덕분에 유치장 신세는 면했다. 그러나 이리저리 불려 다니면서 지루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 불똥은 엉뚱한 데로 튀었다. 나는 벽화 제작비를 받아 파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 신문에서 "김흥수를 파리에 보내면 안 된다"고 쓰는 바람에 두달 동안 여권을 압수당해 떠날 수가 없었다. 그때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선생님이 관계부처에 근무하는 학부모들을 동원해 간신히 여권을 돌려 받았다. 그리고 그 해의 국전에 '한국의 봄'을 무감사로 출품했다. 당시 국전 심사위원인 장발 서울대 미대학장의 얘기에 따르면 내 그림이 심사장에 들어오자 심사위원들이 머리를 숙이고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것이다.

나는 1979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을 열 때 이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당시 소장하고 있던 반도호텔에 문의해 보았더니 호텔이 헐리면서 호텔 소유주인 한국관광공사가 국회에 기증했다는 것이었다. 관광공사 직원은 이 작품을 기증하면서 명부에서도 확인했고, 국회에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작품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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