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생각 저생각 / 95년 삼풍, 아름다운 두 청년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생각 저생각 / 95년 삼풍, 아름다운 두 청년

입력
2003.07.25 00:00
0 0

언제부턴가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특히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두 청년을 떠올린다. 이제 그들도 어쩌면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한 두 명쯤 둔 가장이거나 주부가 되었을지 모르겠다.1995년 여름. 그 해는 어쩌면 그리도 많은 비가 내렸는지. 나는 어려워진 살림에 보탬이 될까 해 조그만 분식집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경험도 없이 시작한 터라 손님이 세 명만 와도 허둥대며 속된 말로 옆집에 난리가 나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느날 가게에 늘 켜두었던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긴박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금부터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속보를…삼풍 백화점이 붕괴…매몰된 인원은 확인이 불가능하고…"로 시작된 보도는 이후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고 온 국민은 한 목숨이라도 더 살기를 기도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당시 내 일기에 의하면 사고 발생 꼭 열흘 뒤인 7월9일. 최명식이라는 21세 된 청년이, 그 이틀 후인 11일에는 19세의 유지환이라는 아가씨가 붕괴된 건물 더미 아래에서 기적같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지금도 현장 소식을 전하던 기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발가락이 보입니다.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끝에 빨간 매니큐어가..." 이렇게 최명식 군과 유지환 양은 사람이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라는 7일을 훨씬 넘겨 다시 살아 돌아왔다.

극적인 구출 사실보다 내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것은 구출 이후의 일화다. 사고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된 후 어느 약삭빠른 음료수 회사에서 그들에게 사고당시 목 말랐던 심정을 표현하는 음료수 광고 모델을 부탁하며 거금을 제시했는데 두 사람 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고로 희생된 다른 사람들에게 도리가 아니라면서.

어쩌면 그들로서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다시 못 올 기회일 수 있었을 텐데 어린 나이에 무엇이 그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히 판단 내릴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일까. 연일 카드 빚을 갚기 위한 어린이 유괴와 부녀자 납치, 또 정치인들의 각종 뇌물수수 사건에 대한 보도가 마음 무겁게 하는 올 여름,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할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두 청년이 나는 더욱 그립다.

/전진숙·서울 구로구 구로1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