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광복 후의 어느날 소련군 주둔 사령부에서 물감을 갖고 사령부로 나오라는 전갈이 왔다. 나가 보니 그곳에는 도쿄미술대학 3년 선배로 함흥고보 교사인 김좌선씨가 있었다. 당직 장교는 100호 정도의 캔버스를 갖다 두고 김씨와 나에게 각각 스탈린과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했다. 나는 이걸 제대로 그려줬다가는 일생 동안 이런 그림만 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야수파식으로 그렸다. 잠시 후 장교가 와서 보고 사실적으로 그린 김좌선씨는 그곳에 남으라고 하고 나에게는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나가라고 했다.그리고 해를 넘겨 나는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평양미술동맹 위원장으로 있던 정관철씨를 찾아갔다. 정씨는 나보다 도쿄미술학교 2년 선배이다. 그는 "평양에 국립미술학교가 세워질 것이니 맡아달라"고 권유했으나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사상문제로 주목을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북한의 미술경향과 맞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나는 어머니와 작별하고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는 4월에 교사모집이 끝나 취직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마침 함흥에서 안면이 있던 영생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문교부 중등교육과장으로 와 있어 그의 소개로 신설학교인 경기사범학교(서울교대의 전신) 교단에 서게 됐다.
그때 나는 동생 완수와 함께 집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다가 친구의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사범학교에는 나이 많은 여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젊은 남자선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학교 운동회에서 가장행렬 지도를 하면서 키가 크고 예쁘장한 한 여학생을 한국대표로 뽑아 세웠는데 그 뒤로 이 여학생이 나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모 학교 교장선생님 딸인 그 여학생은 집에 놀러 오겠다고 하기도 했고, 내 미술작업을 도와주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오면 안 된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이 여학생은 이 일로 나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경기사범 교장선생님의 제자인 교사와 함께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는데 며칠 후 청구서가 온 것을 보니 터무니 없이 비싸게 나왔다. 주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그 교사가 전에 먹은 외상값까지 계산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교사에게 호통을 치고 몇 대 쥐어박았다.
그런데 그 후 이 교사는 "김 선생이 나를 좌익이라고 구타했다"면서 좌익성향 학생들을 선동했다. 이 학교에는 광복 이후 데모하다가 쫓겨온 좌익 학생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나에게 면박을 받은 그 여학생도 나를 모함하는 데 앞장섰다. 또 유경채(99년 작고)씨 등 나와 친한 교사들마저 슬슬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곧바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을 불러 내가 집에 못 오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훈계를 했다. 하지만 그 후 나는 여학생이 유부남인 음악교사 집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다. 뒤에 나는 그 여학생이 그 교사와 결혼했고, 골수 공산당원이던 그가 월북해 버리는 바람에 전처 자식들까지 도맡아 힘겹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기사범을 그만 둔 나는 함흥고보 은사가 교장으로 있던 춘천사범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내가 좌익으로 몰리는 일도 벌어졌다. 좌익으로 몰린 한 학생을 퇴학시킬지 여부를 놓고 교사 회의를 할 때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학생들을 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지도를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썰렁했다. 그리고 나까지도 좌익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때 기숙사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익성향의 춘천고보 학생들이 좌익성향의 춘천사범 학생들을 습격할 것이라는 얘기가 들렸다.
이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밤새 몽둥이와 돌멩이 등으로 무장하고 기다렸다. 소요 조짐을 알게 된 경찰에서는 숙직을 하는 나에게 학생들을 해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학생들이 자기를 보호하겠다고 그러고 있으니 춘천고보부터 습격을 하지 못하게 하면 자연히 해결된다"고 경찰에 얘기했다. 그리고 학생들을 찾아가 타일렀더니 학생들이 모두 조용히 해산했다. 일이 잘 풀렸는데 이게 오히려 화근이 됐다. 내가 좌익 학생들을 조종하고, 부추긴다는 얘기로 비화했다. 며칠 후 나는 이곳에서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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