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부 데스크로서 북한 핵 관련 미국 언론보도를 지면에 반영하면서 당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남북관계 나아가 민족의 안위에 관련된 중요 사안들인데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력 언론들이 기사를 함부로 쓰진 않겠지만 국제정치의 게임과 관련돼 있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도 떨칠 수가 없다.북한이 산악지역의 지하 어딘가에 제2의 핵 재처리시설을 감추고 있을 것이라는 20일자 뉴욕 타임스 보도도 그랬다. 물론 이 보도 내용이 나름대로의 근거와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무턱대고 폄하하기는 어렵다. 핵 재처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크립톤 85 가스가 휴전선 부근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확인됐다는 것은 10여일 전에 보도됐고 미 관리들은 이를 사실상 확인했다. 문제는 크립톤 가스가 북한의 핵 재처리시설로 알려진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에서 방출된 것이 아니라는 분석 결과다. 미국은 첩보위성과 고공정찰기 등을 통해 수년동안 영변지역을 집중 감시해 왔는데 그 데이터를 정밀 분석한 결과 크립톤의 방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론은 자연스럽게 제2의 핵재처리 시설이 북한의 산악지역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뉴욕 타임스는 북한이 중요한 무기생산시설이나 지휘통제 시설을 지하에 은닉하고 있고 1만1,000개에서 1만5,000개에 달하는 지하 군사시설이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지하에 핵재처리시설을 숨기는 것도 가능한 일임을 시사한다. 북한이 땅굴파기에 도가 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막대한 열이 발생하고 다량의 전력이 소모되는 핵 재처리시설을 지하에 은밀히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뉴욕 타임스는 '몇 가지 기술적인 난점이 있지만'이라고 언급하는 정도로 이 같은 측면을 과소평가한다. 북한은 지금까지 알려진 핵재처리기술이 아닌 미지의 핵재처리 신기술을 보유하고라도 있다는 것일까.
러시아의 전문가들은 극동지역에 사용후 핵연료를 사용하는 원자력 발전소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발생된 크립톤 가스가 한반도로 유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극단적으로 북한이 미국과의 게임을 위해 정식 재처리시설이 아닌 곳에서 폐연료봉을 초산으로 녹여 의도적으로 크립톤 가스를 발생케 했을 개연성까지 거론한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는 이러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새로운 고폭실험 장소 발견을 근거로 장거리 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소형핵무기 개발가능성을 보도한 7월1일자 뉴욕 타임스 보도도 비슷한 사례다.
최근 한미안보 관련 세미나 참석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했던 국제부장들은 뉴욕 타임스 도쿄 특파원과 이 주제를 갖고 화상토론을 벌였다.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반도 안보관련 보도의 무책임성을 제기하자 그 특파원은 "근거 없는 기사는 쓰지 않는다"며 "상품을 소비자가 평가하듯 뉴스라는 상품의 평가도 뉴스 소비자의 몫"이라고 편하게 얘기했다.
이번 뉴욕 타임스의 북한 제2 핵시설 보도를 접하면서 그 때 느꼈던 착잡함이 되살아 난다. 미국은 막강한 정보 수집력을 통해 군사정보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정보 종속의 문제인데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이 계 성 국제부장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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