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의 도이체방크 본부에는 빌딩 관리인만 있을 뿐이다."뉴욕, 도쿄와 함께 세계 3대 금융시장인 런던 금융시장 관계자가 시장의 위상을 자랑하기 위해 전해준 말이다. 그에 따르면 독일 최대 민간은행인 도이체방크는 체면상 본부는 프랑크푸르트에 두고 있지만, 행장 이하 임원 전원은 런던 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보다는 런던 금융가에 고급 금융정보가 더 많이 흘러다니고, 세계 금융계 거물들을 더 자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 간부들이 본점을 비울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런던은 세계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영 대사관 이승우 재경관은 "세계 3대 금융시장 중에서 뉴욕과 도쿄가 각각 미국, 일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 런던은 외환거래와 대규모 국제자본거래가 주종을 이루는 진정한 의미의 국제금융 중심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런던의 금융 밀집지역인 '시티(City)'에는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온 크고 작은 금융기관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런던에서 활동하는 외국은행의 숫자는 468개로 프랑크푸르트(267개), 뉴욕(253개)보다 두 배나 많다. 또 하루 평균 1조달러(약 1,100조원)의 돈이 거래된다. 세계 외환거래의 31%인 5,040억달러가, 전세계 파생금융상품의 7%인 2,750억달러가 런던 금융시장에서 거래된다.
런던에 사무소를 둔 금융기관이 보유한 자산을 모두 합하면 한화로 경(京) 단위가 넘어간다. 은행부문(6조8,000억달러)과 연기금(4조8,000억달러)이 보유한 자산을 합치면 11조6,000억달러인데, 이는 한화로 1경2,760조원이다.
면적으로 따지면 서울 중구보다도 적은 '시티'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영국 정부에 따르면 2002년 중 영국 금융산업이 창출한 GDP는 전체의 5.3%. 법률자문과 경영컨설팅 등 금융 연관 지식산업까지 감안하면 영국 전체 GDP의 25%에 달한다. 또 직접적으로는 104만명, 연관산업까지 포함하면 203만명의 영국인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다.
금융을 포함한 지식산업은 영국을 먹여 살리는 핵심 산업이다. 제조업 경쟁력이 한계에 달한 영국은 지난해 상품교역에서 343억9,400만파운드(약 625억달러) 적자를 냈으나, 금융부문(153억파운드)과 로열티·기타 서비스 교역(104억파운드)에서 257억파운드의 흑자를 냈다.
런던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가 된 이유는 경쟁국에 앞서 금융 시장을 완전 개방하고 규제를 철폐했기 때문. 1979년 대처 수상은 '외화유출'을 우려하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외환거래를 전면 자유화하고 86년에는 '금융 빅뱅'으로 불리는 대개혁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런던 금융시장에서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면 누구라도 사업을 할 수 있다. 요컨대 영국 정부의 발 빠르고 과감한 개방 및 규제완화 조치가 영국을 먹여 살리는 오늘의 런던 금융시장을 만든 셈이다.
그러나 런던 금융시장이 성공한 데에는 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영국만의 특성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영국이 세계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법률 체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런던에 사무소를 둔 독일계 금융기관의 한 관계자는 "79년 대처 총리가 집권한 이후 영국의 전략은 철저히 미국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런던 금융시장이 성공한 것은 개혁조치도 작용을 했지만, 사실은 세계 금융시장의 전주(錢主) 노릇을 하는 미국 금융인들이 언어장애가 없이 자유롭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 런던을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KOTRA 런던무역관의 김상관 관장은 "제조업 기반이 없더라도 서비스나 금융업에 특화하면 국가 경쟁력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국 사람들은 자본주의 원리에 충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 기반을 도외시하는 영국식 발전모델이 한국 현실과는 맞지 않지만 대외 개방과 규제 완화, 끊임없는 개혁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지적했다.
/런던=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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