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조선 학생들을 징병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말이 지원병이지 그것은 강제 징병이나 다름 없었다. 3학년이 끝날 무렵 유화과 후배인 스기노라는 친구가 나를 보더니 미쓰하시 대좌가 나를 부른다고 했다. 그는 자기도 방금 지원병 신청을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 소리에 나는 "이 바보 같은 자식, 이것이 우리 전쟁이냐"고 쏘아 붙였다.그리고 나는 야영 훈련 때 사이토 중위한테 당한 굴욕을 떠올리며 평소 갖고 다니던 곤봉을 든 채 교관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왜 불렀소?"라고 따지듯 물었다. "천황 폐하께서 온정을 베풀어 조선 학생에게도 지원병의 기회를 주었으니 명예스럽게…." 미쓰하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뭐가 어쩌고 어째? 너희들 나보고 짱고로의 X같은 놈이라고 했지. 그 짱고로가 왜 너희들 전쟁에 나가?"하며 곤봉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그리고 "다시 그런 소리하면 이 학교에 불을 질러 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왔다. 그때의 통쾌함이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그때 배속 장교들이 집요하게 요구한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당시 나는 다카코라는 여인과 계약결혼을 해 동거하고 있었는데 그와 결혼하기 위해 함께 귀국한다는 증명서를 일본 경찰로부터 받았다. 그리고 쓰루가(敦賀)항에서 청진행 배에 올랐다. 22시간의 긴 항해 끝에 청진에 도착,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원병에 끌려가는 게 걱정돼 결혼식부터 올렸다. 그런데 바로 그 결혼식 날 뜻밖의 사건이 벌어져 나는 결혼 며칠 후 유치장에 들어가 6개월간 갇혀지내야 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결혼식 날 피로연장에서 한 친구가 술김에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독립선언을 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잘못됐다. 이경필이라는 친구가 집에 돌아가 자기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고, 그 동생은 학교에 가서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선언을 했다"고 떠들었다.
이 바람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고 선생이 그 동생을 경찰에 고발했다. 이날부터 피로연에 참석했던 친구들이 줄줄이 잡혀가 조사를 받고 나도 결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됐다. 그런데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던 고등계 형사가 우리를 사상범으로 몰아넣으려고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을 했다. 내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자 그는 "소 같은 놈"이라고 욕하다가 나중에는 포기했다.
나는 유치장에서 꼬박 6개월을 지냈다. 여관을 운영하던 우리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 매일 내 사식을 넣어주었고 교도관에게까지 음식을 챙겨주다 보니 그와도 친해져 별 불편은 없었다. 정작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도쿄미술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바로 지원병으로 끌려가는 일이었는데 이마저도 무사히 넘겼다. 그리고 곧 검찰에 송치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면회를 온 어머니에게 일본인 담당 검사를 찾아가 달라고 했다. 나는 그 검사에게 내 말을 전하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하고 3년 안에 나쁜 일이 있으면 며느리 잘못 들여서 그런 것이라고들 한다. 결혼식장에서 발생한 일인데 내가 어떻게 앞으로 결혼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는 심정으로 한 말인데 효과를 보았는지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나는 2주일 동안 석방절차를 밟았다. 미결수로 가득찬 방은 유치장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당시 우리는 20명이나 같은 사건으로 송치됐기 때문에 형무소 안에서는 정치사건으로 소문이 나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형무소에서 나온 날부터 나는 취직을 하려고 분주히 돌아다녀야 했다. 직업이 없으면 근로보국대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함흥에 있는 여자 실업학교 미술교사로 취직이 됐고 그 해 제23회 선전에 '밤의 실내정물'을 출품해 특선으로 뽑혔다. 그리고 해방을 맞았다. 이때 함흥에는 소련과 인민 정부에 항의하는 격렬한 학생시위가 일어나 학생이 총에 맞아 죽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던 제자들이 시위를 주동하고, 소위 반동 분자들과 가깝게 지낸 나는 배후 조종자로 몰리게 됐다. 이때부터 함흥은 내가 살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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