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 왕은 가락국 백성들이 낙동강 왕래에 불편을 느끼자 자신의 남근을 다리처럼 양쪽에 걸쳐 놓았다. 사람들은 이를 다리로 믿고 무심코 건너 다녔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지게를 내려놓고 쉬면서 곰방대를 꺼내 담배를 피우다가 다리 바닥에 불을 껐다. 그 순간 왕이 뜨거워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꾹 참았다. 그 이후로 왕의 남근에는 검은 점이 생겼다. 김수로 왕의 왕비 허 왕후의 성기도 엄청나게 컸다. 어느 날 잔치가 열렸는데 바닥에 까는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생각 끝에 왕후는 자기의 거대한 성기를 거기에 두었다. 잔치가 무르익어갈 무렵 한 사람이 뜨거운 국물을 엎질렀다. 왕후는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참고 잔치를 끝냈다. 그 바람에 성기에 흉터가 생겼다.'가야 건국 시조인 김수로 왕의 남근에 얽힌 구전 설화는 우리나라의 성기숭배를 보여주는 대표적 이야기이다. 이처럼 과장되고, 희화화한 성기 이야기는 비범한 능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풍요와 다산(多産)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또 남녀 성기를 빗대어 부르는 자연물이나 성 행위 장면을 형상화한 토우, 성 관계를 상징하는 놀이 등은 우리 민족에게 성이 출산과 쾌락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민속학자인 이종철(60) 국립민속박물관장이 우리의 성문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의 성 숭배문화'(민속원 발행)를 냈다. 1980년대 초부터 20여년간 전국 87곳의 현장을 답사해 수집한 유물과 유적, 민속자료, 전통놀이 자료 등을 토대로 성 담론과 배경, 의식 등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우리의 성 숭배 문화는 공동체 신앙으로서 다양한 의미와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당초 장승을 연구했는데 우리 성 숭배 형태와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빠지게 됐습니다."
그가 파악한 우리의 성 숭배 문화에서 가장 적나라하고 대담한 표현을 보여준 조상은 신라인들이다.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된 토우에서는 당시의 자유분방한 성의식과 여성관 등을 엿볼 수 있다.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30호 고분군과 노동동 고분에서 나온 토우는 온갖 체위의 성 행위를 형상화하고, 여인의 음부를 과도하게 드러냄으로써 풍농과 풍어, 다산, 사자의 재생 등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다. 그는 또 1978년과 1996년 경주 왕경지구에서 나온 남근 조각은 귀두의 직경이 최대 7.5㎝에 이르고 귀두와 주변의 피부 주름, 요도 등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신라인들의 개방적 성의식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고대인들은 성기 노출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드러내면서 성을 즐겁고 밝은 눈으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유교의 엄숙주의가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성행위 자체도 신성시됐다고 봅니다."
"시골에서 남녀 성기 이야기를 묻고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하다가도 말문이 한번 터지면 끝이 없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이 관장은 "그 동안 업무에 쫓겨 제대로 파고들지 못했는데 앞으로 여유를 갖고 욕설, 속담 등에 담긴 성문화를 다뤄보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1968년 민속박물관 학예사로 출발해 내년 6월 정년을 맞는 그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출신으로 영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장승'(1988) '서낭당'(1994) 등의 연구서를 펴냈고 '성, 숭배와 금기의 문화'(1997) 등의 공저가 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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