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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욕망에 저당잡힌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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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욕망에 저당잡힌 사회

입력
2003.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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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예전의 술 권하는 사회에서 이제 신용카드라는 명목으로 빚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며 이러다가 멀지 않아 국민이 모두 빚쟁이가 되는 시절이 올지 모른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진 않지만 카드 발급이 너무 순조로운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카드로 물건을 손쉽게 살 수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살다가 보면 빚을 질 수야 있다. 더구나 청춘시절에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청춘시절엔 부족한 게 많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적금을 들어놓고 만기까지 부었던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중간에 꼭 돈을 써야 할 일이 생겨 깨곤 했으나 그렇게 깰 무엇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시인이 인생이란 외상값! 이라고 시를 써서 발표했을 때 맞아, 하며 공감하기도 했다.

청춘시절에 결핍이 없으면 에너지가 전부 소비와 욕망을 향해 치달아 인생을 두려워하기도 전에 신비감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살아가느라고 진 빚이나 외상값은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그걸 갚기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 배우게 되는 세상이 있다고 여긴다. 어찌어찌하여 빚을 갚고 났을 때의 쾌감은 갚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 이리저리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한 여성이 하는 말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이 놀라서 채널을 고정시켰다. 그 여성이 하는 말은 자신이 지고 있는 카드빚을 갚아주면 상대가 나이가 많든 자식이 있든 상관없이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여성은 깨끗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텔레비전이라는 공개된 화면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듣기에는 좀 어색한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무슨 게임을 하는 중인가? 생각하며 화면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인터뷰를 지켜보았다.

시골출신의 한 여성은 가방이나 신발 옷 같은 명품을 사들이다가 4,000만원의 빚을 졌다고 했다. 카메라는 그 여성이 사는 방을 비추었다. 시계가 350만원짜리라고 했다. 다른 명품에 비하면 비싼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 여성도 그 빚을 갚아주는 조건이면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대개가 20대 초반의 젊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들이었다. 명문대학을 나왔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었다.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어쨌든 현재 자신이 지고 있는 카드빚을 갚아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진행자의 입에서 '원조 결혼'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나서야 나는 이게 게임이 아니고 현실인가 보네, 싶었다. 그들의 빚은 보통 몇 천만원이며 억대였다. 본인들의 힘만으로는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액수들이었다. 저렇게 젊은 나이에 인생을 저렇게 풀어가 버리는 그들을 향한 의아함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빚이란 엄청난 재앙이며 무시무시한 공격성을 내포하게 되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빚을 지는 이유가 저렇게 황당할 수가 있는가. 명품이라는 허구에 눈이 먼, 혹은 유흥이라는 욕망에 붙들린 빚들이라는 사실에 맥이 빠진다. 피치 못한 생존 때문에 지게 된 빚이 아닌 것들은 감당 못할 뒷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자식이 진 카드빚 때문에 유서를 써 놓고 부모가 자살하기도 하고 당사자가 빚을 갚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신의 빚을 갚아주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는 것 정도는 어쩌면 뉴스거리도 못될 일인가.

카드사의 무책임을 탓하는 것도, 젊은이들의 무분별을 공박하는 것도 이제 상투적인 대응이라는 느낌을 벗어날 수 없다. 언제부턴가 어디서부턴가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울하게 한다.

신 경 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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